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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나의 송사] 2. 가난해서 빛나던 문학-이문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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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20세기는 지금 이 지상에 머물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위대하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다. 모든 사람이 저마다 이 세상에 왔고 그리하여 지금 이렇게 살고 있기 때문에 위대한 것이다.

그런데 이 20세기가 바야흐로 저물어가고 있다. 새로운 세기 그리고 새로운 천년이 바짝 다가와 다음 순서에 대기하고 있는 까닭이다.

20세기와의 작별은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모처럼 하나가 된 운명이다. 그러므로 20세기와의 이별은 모름지기 경건하고 엄숙해야 할 것이다. 또한 앞으로도 두고두고 문득문득 만날 역사속의 자화상이므로 마땅히 각자에게 아름답게 기억돼야 할 터이다.

그러나 20세기가 위대한 것은 오로지 이 세상에 와서 이렇게 머물고 있는 사람들의 존재와 삶의 의미로 하여 위대한 것만은 아니다. 일찍이 이 세상에 왔다가 진작 돌아간 사람들의 자취와 숨결이 아직도 여전히 남아 있는 탓으로 인하여 위대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20세기는 우리나라의 근대문학 100년사이기도 하다. 갖은 우여곡절이 사슬로 이어진 20세기라지만 우리의 근대문학사는 불운보다 행운이 우위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무슨 이유인가. 별자리가 뚜렷한 기라성이 연년세세 이 나라에 와서 값진 유산을 넉넉하게 상속시키고 떠났기 때문이다.

1900년 20세기 벽두에 온 큰 별은 김동인과 현진건이었다. 이듬해에는 박종화 심훈 최서해가 오고, 1902년은 김소월과 채만식이, 1903년은 김팔봉과 이은상과 정지용이, 다음해에는 박화성 이육사 이태준이 왔으며, 1905년 김광섭, 1906년의 이주홍에 이어서 1908년에는 김유정 김정한 유치환과 임화가, 1909년엔 박태원 신석초 오영수가 왔다.

또 1910년에는 이상과 모윤숙이 오고, 1911년엔 노천명 박영준 안수길 이원수가 오고, 1912년엔 최정희, 1913년에는 김동리와 김현승이 왔다.

그리고 1915년의 강소천에서 1934년의 김관식 사이에는 박목월 박남수 손소희 윤동주 이영도 한무숙 조지훈 김수영 선우휘 박용래 신동엽 박재삼 등이 차례로 왔던 것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던가. "죽는 날까지/하늘을 우러러/한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 했다" 고 제목 없는 시로 고백한 그 선배는 우리에게 무었이었던가.

또 "우리는 여지껏 희생하지 않은 오늘의 문학자들에 관해서/너무나 많이 고민해왔다/김동인, 박승희같은 이들처럼 사재를 털어놓고/문화에 헌신하지 않았다/김유정처럼 그밖의 위대한 선배들처럼 거지짓을 하면서/소설에 골몰한 사람도 없다……/그러나 덤핑출판사의 20원짜리나 20원 이하의 고료를 받고 일하는/14원이나 13원이나 12원짜리 번역일을 하는/불쌍한 나나 내 부근의 친구들을 생각할 때/이 죽은 순교자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우리의 주위에 너무나 많은 순교자들의 이 발견을/지금 나는 하고 있다" 고 분노한 그 선배는 우리에게 무었이었던가.

그리고 하늘의 어느 별을 바라보며 "이렇게 정다운/너 하나 나 하나는/어디서 무엇이 되어/다시 만나랴" 하고 탄식한 그 선배는 또 우리에게 무엇이었던가.

그들은, 그 '위대한 선배들' 은 여러 말할 것 없이 바로 빛이요 힘이었다. 꿈의 실체요 영혼의 순례지였으며 장엄한 성역이었다.

그러한 선배들이라 하여 한결같이 고상한 초상만 보여준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들 가운데는 이데올로기의 허망한 나팔수로 나섰다가 설 자리를 잃어 마침내 몸과 글을 망친 이도 있고, 이날토록 그 후계자가 나오지 않을 만큼 생애의 절반을 남다른 기행(奇行)으로 소비한 이도 있었다.

"니코틴이 내 횟배 앓는 뱃속으로 스미면 머리 속에 으례히 백지가 준비되는 법이오. 그 위에다 나는 위트와 패러독스를 바둑 포석처럼 늘어놓소" 하면서 삶을 역설적으로 풀어가며 살고 간 이도 있고, 늙도록 무례한 권위주의에 맞서서 온갖 구박을 받아가며 싸우다가 떠나는 날에야 현직 대통령의 정중한 추도사를 뒤로 하고 저승길에 오른 이도 있었다.

무릇 인간을 소우주라고 일러왔다. 인간에게는 명암이 있다. 대우주에 음양이 있으니 소우주에 명암이 있는 것은 마치 하나가 있어서 둘이 있고 둘이 있어서 셋이 있는 서수의 안팎과 같다.

그러므로 후배들은 선배들의 뜻과 삶에 서슴없이 동의하였다. 베스트 셀러란 말도 없었던 시절이라 인기작가라는 말도 생기기 전이었지만, 문예지의 송년호나 신년호에 늘 권말부록으로 실리던 문인주소록을 다 뒤져도 전화번호가 몇군데 밖에 없었던 변두리 시민들이었지만, 대개 먹고도 배 고프고 입고도 헐벗었던 후배들은 선배 아닌 그 '순교자' 들의 모습을 저만치에서 우러르며 아름답게 여겨 기꺼이 그 뒤를 따르기로 각오를 다짐하였으니, 후배들에게는 그러한 각오 자체가 긍지요 행복이었던 것이다.

그 행복은 오늘도 유효하고 내일도 유효할 것이다. 스스로 솟는 샘은 본디 보이지 않게 저장된 수원이 차고 넘친 나머지가 솟는 것인지라 비록 메마른 토양일지언정 황폐를 두고 볼 성질은 또 아닌 것이다.

오늘날 우리 문인들이 받는 사회적인 대우는 근본적으로 문학에 대한 모욕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릇된 모욕은 무엇의 그릇된 이해나 그나름의 무식이 빚은 실수이기가 쉬울진대 20세기에 못다한 명예회복을 다음 세기에 기약할지라도 늦다고 할 것이 없다.

대저 세월이 바뀌면 인간이 바뀌고 인간이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 그러므로 새로운 것은 모두가 그전의 것들이 바뀐 것이니 하물며 묵은 천년이 새로운 천년으로 바뀐 다음의 일을 말할 것이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영혼까지 바뀐다는 것은 상상조차도 저어할 일이다.

짐짓 윤회전생설에 생각이 미친다고 해도 해와 달이 동산에서 서산으로 윤회를 되풀이하되 언제 보나 해는 해요 달은 달인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설사 어딘가 다른 데가 있다한들 예컨대 모든 것이 신의 작품이라고 해도 그 모든 신의 작품이 곧 신이 아닌 것과 무엇이 얼마나 다를 것인가.

21세기에 새롭게 오는 문인들에게도 인간에 대한 애정과 신뢰와 희망이라는 문학의 또다른 이름 만큼은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값이 없어지다시피한 인간의 위신에 대하여 분노하고 그로써 분발하여 문학의 훼손된 명예회복을 인간회복이라는 과제를 푸는 것으로서 이룩하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아울러서 자고나면 등장하는 새로운 물질에 대하여 거리를 두도록 기대한다.

간단히 말하여 감옥이 감옥인 것은 흙과 나무로부터 격리된 공간에서 비롯된 것이니, 해방이 해방일 수 있는 것은 자연이 자연일 수 있기 때문임을 잊지 않도록 기대한다.

요즈음 쓰는 자연친화적 운운하는 말이야말로 통 자연스럽지 않은 수사(修辭)로 기억하고, 그리하여 전자문학(電子文學)이 지닌 생리적인 부박성에 대하여 늘 경계하는 자세를 기대한다.

21세기는 문화의 세기가 될 것이라고 장담하는 이가 있다. 부디 그렇게 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20세기야말로 '문학의 세기' 였다. 20세기여, 그대는 정녕 위대하였도다.

이문구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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