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화가 하인두 10주기 추모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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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8면

89년 4월 인사동 선화랑에서 열린 서양화가 하인두의 개인전은 지인(知人)들의 숨죽인 울음소리가 가득한 눈물의 전시회였다.

직장암으로 3년이 넘는 투병 생활 동안 두 차례의 대수술과 다섯 차례의 입원, 길고 지루한 항암 치료와 각종 민간요법 등 병마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면서도 초인적 의지로 붓을 놓지 않던 그였다.

피를 토하듯 내놓은 작품이 바로 '혼(魂)불-빛의 회오리' 시리즈. 그는 이 전시를 마지막으로 6개월 뒤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59세였다.

한국 추상미술 1세대로 '뜨거운 추상' 의 대명사로 꼽히는 하인두 화백의 10주기 추모전이 12~28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다. 타계한 이듬해 호암갤러리에서 유작전이 마련되고 나서는 처음으로 마련되는 대규모 전시다. 1백호가 넘는 대작 '혼불' 시리즈와 더불어 53년부터 발표한 유화.수채화 등 대표작 70여점으로 꾸며진다.

57년 서울대 미대를 졸업한 후 앵포르멜 운동에 참여하는 등 추상미술의 길을 줄곧 걸어왔던 그는 불교 사상을 도입한 '만다라' 연작부터 본격적으로 생성과 순환의 원리를 바탕으로 한 독특한 조형적 세계를 굳혀나갔다.

박서보 화백(홍익대 명예교수)과 함께 우리 추상미술의 선구로 꼽히긴 하지만, 박씨가 모노크롬(단색화)으로 방향을 잡아 80년대 우리 화단의 주류로 자리잡은 데 비해 그는 화려한 색채와 기하학적 형상을 끌어들인 독자적 세계를 구축했다.

작고하기 직전 그린 '혼불' 연작은 하인두라는 개인에게 드리워진 비극적 그림자와는 대조적이다.

태극 무늬나 실타래.스테인드글라스.현미경으로 관찰한 세포 등을 연상시키는 띠 모양의 형태들. 그것들은 침착하고 안정된 추상 본연의 속성을 유지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색채 구사와 어우러지게 되면 동심원을 그리며 타들어가는, 또는 사방으로 화염을 뻗치며 회오리처럼 타오르는 불길의 느낌을 주는 '화학작용' 을 일으키고 있다.

평론가들이 유작에서 영원과 생명을 갈구하는 인간의 고통섞인 몸부림을 읽어내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고통이 극심해 '저승에 가면 벌 받을 게 있어도 모두 사해 준다' 고까지 하는 암이라는 병을 앓으면서도 부득부득 우겨 두번이나 전시를 열던 그가 마지막 한방울까지 다 짜내 그린 작품이라는 점을 떠올린다면 수긍이 가는 해석이다.

전시회를 맞아 그가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시절 제자로 만나 같은 길을 걷는 화가로 삶을 함께 했던 부인 유민자씨가 '회상 나의 스승 하인두' 를 원고지 3백장 분량의 작은 책자로 묶어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부인 잘 얻었다" 는 얘기를 자주 들었을 정도로 잉꼬부부였던 하화백과의 생활과 작품 활동에 대한 일화와 회상이 담겨있다. 02-720-1020.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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