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민호 기자의 레저 터치] 1년 여행, 200컷 사진, 그리고 400쪽 베스트셀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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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호 기자

좋은 책은 베스트셀러가 될 수 없다는 출판계 속설은, 적어도 이 한 권의 책 앞에선 수정되어야 한다. 한국은 물론이고 일본에서도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에 오른 이 책은, 경이로운 반응만큼이나 탄탄하고 튼실한 내용을 자랑한다. 단언컨대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나 김훈의 『자전거 여행』 등 내로라하는 여행 관련 걸작에 버금가는 역작이랄 수 있다.

책의 종류는 여행 산문집. 책 제목은, 다소 딱딱한 느낌이 드는 『한국의 아름다움을 찾아 떠난 여행』이다. 평소 한국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했던 한 젊은이가 전국을 다니며 명인을 만나 전통 문화를 배우고 익히는 과정을 여행기로 풀어 쓴 책이다.

우선 책을 둘러싼 열띤 반응부터 보자. 책은 출간되기도 전에 일본 출판사와 8억원에 달하는 계약을 마쳤고, 도쿄에서 열린 출판기념회엔 일본인 팬 4만5000여 명이 운집했다. 한국에서도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10월 셋째 주 현재 종합 베스트셀러 순위 10위에 올라와 있다(한국출판인회의 집계). 책이 소개하는 여정을 따라다니는 여행상품도 대박을 터뜨렸다. 상품 판매 17시간 만에 연말까지 예정된 여정 8개가 모두 매진됐다. 여기서만 3억원을 벌었다.

다음으로 책의 내용. 문외한이 썼다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수준이 높고 내용이 고급하다. 이를 테면 차를 마시고 “첫물차가 여리고 산뜻하고 담백했다면 세물차는 좀 더 어른스럽게 풍부하고 폭이 넓었다”고 표현한 대목이나, 신라 안압지에서 발굴된 14면체 주사위에 쓰여 있다는 ‘삼잔일거(三盞一去. 술 석 잔을 단숨에 마셔라)’의 벌칙을 거리낌 없이 인용한 구절, 1만원권 뒷면에 그려진 천문도 이름이 ‘천상열차분야지도’라고 거침없이 소개한 부분 등에선 전문가 뺨치는 교양과 안목이 물씬 배어난다. 일본 하이쿠의 대부 마쓰오 바쇼나 프랑스 비평가 기 소르망, 영국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 부끄럽지만 이 책에서 처음 이름을 접한 유한 요하임 빙켈만 등을 스스럼 없이 인용할 때는 지은이의 가공할 내공에 살짝 질투가 일었다.

문장도 나무랄 데 없다. 일기장 따위에 끼적거렸을 법한 값싼 감상 따위를 묶은 여행 산문집이 판을 치는 요즘, 이 책이 구사하는 문장은 간결하면서도 날카롭다. 예컨대 ‘바람에 나부끼는 염색 천들이 짙은 석양과도 같아서’란 비유나 ‘인정이란 정서가 우리의 의식주를 관통하고 있다’는 통찰은 시인의 시구마냥 미끈하고 철학자의 문장마냥 웅숭깊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 1년여의 여행 끝에 사진 200컷과 4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원고를 손수 작업한 지은이의 이름은 배용준, 그래 욘사마다. 그는 이 책을 위해 관련 도서 150권을 읽었고 석 달 정도 잠을 못 잤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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