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기관, 빚독촉 피해 이사한 채무자 주민등록 말소 신청 남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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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朴모(37.무직.전북 전주시 평화동)씨는 최근 버스를 타고 가다 간첩으로 의심받는 황당한 일을 당했다. 경찰이 불심검문해 주민등록번호를 일러줬지만 조회 결과 그런 사람이 없다고 나왔기 때문이다.

지난해 부도를 낸 朴씨는 빚 독촉을 피해 몰래 이사했고 이에 채권 금융기관들이 동사무소에 주민등록 말소를 요청, 이같은 상황이 빚어진 것이다.

은행.보험회사.신용카드사.새마을금고 등 금융기관들이 빚을 받아내기 위해 무분별하게 채무자의 주민등록 말소에 나서 말썽이다. 법의 맹점을 이용, 무적(無籍)주민을 양산하고 인권침해와 행정력 낭비를 불러온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 실태〓경기도 용인시 기흥읍사무소에서는 월 평균 40여건씩 주민등록이 말소되고 있다. D가전업체의 할부금을 못낸 金모(28.회사원)씨, L신용카드사의 카드 대금을 안낸 李모(37.회사원)씨 등의 주민등록이 해당 금융사의 요청으로 최근 기흥읍사무소에서 말소됐다.

경기도 고양시 역시 금융기관의 요청으로 지난해 2백70여명, 올들어서는 2백여명의 주민등록을 말소했다. 신청 대비 말소율은 90% 정도다.

대전시 중구 선화동사무소에는 말소 의뢰가 한달 평균 20~30건, 전북 전주시 서신동사무소의 경우 월 평균 7~10건씩 접수된다. 말소율은 20~30%. 이처럼 읍.면.동사무소마다 말소 요청이 쏟아져 공무원들이 진땀을 흘리고 있다. 1~2년 전만 해도 거의 없던 일인데 금융기관 사이에 이 수법이 소문난 것이다.

동직원들은 말소에 앞서 전화나 우편을 반드시 보내야 하고 15일 안에 두세차례 주소지에 나가 거주 여부를 직접 확인해야 한다.

전주시 동사무소 직원 李모(27.여)씨는 "금융기관들이 조기에 말소시켜 주지 않으면 거칠게 항의까지 한다" 며 "채권만 확보하면 된다는 금융기관의 횡포" 라고 말했다.

은행 관계자는 "연락이 닿지 않는 채무자의 경우 채무자 재산 처분이나 채권 연장 재판에 주민등록 말소 서류를 제출해야 해 어쩔 수 없이 말소 신청을 하고 있다" 고 해명했다.

◇ 정상적 사회생활 불가〓주민등록 말소자는 호적등본은 살아있지만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하다. 재산권 행사를 위한 인감증명은 물론이고 입학.취업 등에 필요한 주민등록 등.초본 등을 발급받을 수 없다. 투표권도 없고 예비군법 위반으로 처벌받는다. 또 주민등록을 살리기 위해서는 과태료 10만원도 부담해야 한다.

◇ 문제점.대책〓현행 주민등록법에는 이해관계를 증명만 하면 법인.개인 등 제3자 누구나 주민등록 말소를 의뢰할 수 있도록 돼 있다. 금융기관들이 이같은 맹점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당초 주민등록 말소 제도는 주민등록상 거주자와 실제 거주자를 확인, 정리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다. 안호영(安浩永)변호사는 "주민등록 말소가 남용되면 시민의 불이익은 물론이고 인권침해 소지도 크다" 며 "따라서 말소 신청 자격을 엄격히 제한하는 법적인 보완이 필요하다" 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또 "재산처분이나 채권연장 소송 때 주민등록 말소 서류 대신 내용증명 우편을 인정해 주는 등 서류 간소화 절차도입이 필요하다" 고 말했다.

장대석.정찬민.전익진.김방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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