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24시] 일본어 지켜야 일본이 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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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요즘 일본에선 이와나미(岩波)서점출판사의 '일본어연습장' 이 출판계를 휘젓고 있다. 올 1월 발간 이래 일본출판판매㈜의 베스트셀러 집계에서 35주 동안 논픽션 부문 1위에 올랐다.

지금까지 판매 부수는 1백60만부. 언어학자 오노 스스무(大野晉)가 쓴 이 책은 낱말.문법.경어에 대해 45개의 문제를 내고 해설을 단 글쓰기 교본이다.

저명 소설가의 작품과 유력지 신문기사를 예문으로 싣고 잘잘못을 하나씩 송곳처럼 따져 나간다. 저자는 "60년간의 일본어 연구를 집대성한 것으로 누구라도 읽기 쉽게 꾸몄다" 고 말했다.

학습서의 경우 10만부만 나가도 성공작으로 평가받는데 이미 밀리언셀러가 됐으니 출판계.학계는 놀라고 있다. 덕분에 불황에 허덕여 온 이와나미서점은 오랜만에 기지개를 켰다.

전전(戰前)부터 출판을 통해 일본의 교양을 끌어올려 왔다는 '이와나미 신화' 가 건재하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이 출판사의 아마노 야스아키(天野泰明)담당은 "많은 책을 펴냈지만 20세기 들어 '일본어연습장' 만큼 남녀노소로부터 사랑을 받은 책은 드물 것" 이라고 말한다.

일문학자 이시하라 지아키(石原千秋)가 펴낸 '비전(秘傳)중학입시국어해독법' 도 인기있는 일본어 독본이다.

제목이 '중학입시' 지만 내용은 일반인을 상대로 한 책이다. 초등학교 고학년 수준의 기초적인 예문을 등장시켜 책을 읽어가다 보면 자신의 일본어 기초실력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맹점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올 3월 발매 이후 5만부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는 이 책은 당초 판매목표(8천부)의 5배나 팔려 나갔다. 일본어 붐을 타고 각종 잡지도 특집기사를 내보내고 있다. 주간 아사히(朝日)최신호는 '당신의 일본어를 연마해주는 30권의 책' 을 소개했다.

최근 일본내의 '일본어 붐' 은 두 갈래로 해석된다. 하나는 인터넷 시대의 도래다. 10년전까지만 해도 일반인은 편지나 일기, 간단한 메모를 빼고는 거의 글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회사.학교.가정에서 전자 메일로 의사를 전하는 것이 다반사가 됐다. 때로는 다수의 네티즌을 상대로 자신의 주장을 쉽고 정확하게 전달해야 하는 세상이다.

월간지 '선택' 은 "현실적 필요가 일본어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새로운 언어 문화를 낳고 있다" 고 풀이한다.

다른 하나는 일본어 쇠퇴에 따른 위기감. 일본 열도는 요즘 '영어 증후군' 에 휩싸여 있다. 영어가 인터넷 언어의 80%를 차지하자 문부성도 초등학교 영어 회화교육을 검토중이다.

사카키바라 에이스케(□原英資)전 대장성 재무관을 비롯한 일부 식자층은 "아예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 고 외치는 판이고 니시가키 도루(西垣通)도쿄대 교수는 "21세기에는 영어를 제외한 다른 언어들은 쇠퇴할 게 뻔하다" 고 단정한다.

따라서 영어에 대한 강박관념과 일본어가 뒷전으로 밀려나는 반작용이 맞물리면서 일본어 갈고 닦기와 지키기 현상이 표출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요즘 일본어는 한자와 서구에서 유입된 신조어로 뒤죽박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어 바로 세우기' 바람이 거세다.

한국도 이제 인터넷 시대를 맞아 세계적인 독창성을 자랑하는 한글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오영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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