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초 통역이 경기를 지배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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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인천 문학구장에서 열린 SK와 두산의 프로야구 플레이오프 1차전. SK 가토 투수코치(가운데)가 마운드에 올라 위기에 빠진 선발투수 게리 글로버(왼쪽 둘째)에게 일본어로 얘기하고 있다. 통역원 김현수씨(오른쪽 둘째)는 가토 코치의 일본어를 듣고 글로버에게 영어로 전달한다. 그러나 글로버는 한국인 포수 정상호를 바라보고 있다. 가장 긴박한 순간에 3개국 언어가 화학반응을 하듯 이리저리 뒤섞이고 있다. 인천=김진경 기자

2009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2차전이 열린 17일 광주구장. 1차전을 3-5로 내준 SK 와이번스가 2차전도 1-2로 KIA 타이거즈에 패했다. 선발투수는 송은범이었다. SK는 비상이 걸렸다. 더그아웃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SK의 일본인 투수코치 가토 하지메는 옆자리에 앉은 에이스 투수 게리 글로버의 컨디션을 물었다. 둘 사이엔 언어장벽이 있다. 짧은 대화는 가능하지만 정확하고 오해 없는 소통을 위해 통역의 과정을 거친다. 카토 코치가 일본어 통역원에게 말한다. 이 말은 다시 영어 통역원을 거쳐 글로버에게 전달된다. 글로버는 “3차전에 던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의 말은 역순으로 가토 코치에게 전해졌다.

2007년엔 이런 일도 있었다. SK 가토 코치는 미국 투수 마이클 로마노가 서있는 마운드에 올랐다. 한국인 포수 박경완도 합류했다. 국적과 언어가 서로 다른 세 명을 이어주기 위해 영어 통역원과 일어 통역원이 각각 따라 올라왔다. 5명이 모인 마운드에선 3개 국어가 오갔다. 의사결정은 지체됐고, 그 과정에서 곡해도 있을 수밖에 없다. 이후부터는 심판진의 권유에 따라 통역 한 명만 올라온다.지난 11일 서울 잠실구장에서 있었던 SK와 두산의 플레이오프 4차전. 선발투수로 나섰던 글로버가 위기에 몰리자 가토 투수코치와 정상호 포수 등 세 명이 마운드에 모였다. 그들 가운데엔 영어와 일본어를 동시에 구사하는 김현수(38) 통역원도 있었다. 3자 간 의사 전달을 긴박하게 수행하는 김 통역원의 표정이 흥미로웠다.

'공식 대화'가능한 곳은 마운드뿐
기업이 문서로 소통하듯 야구는 수신호로 커뮤니케이션을 한다. 야구팀은 경기당 300개가 넘는 사인을 주고받는다. 손동작만으로도 완벽에 가까운 의사 교환을 할 수 있다. 그라운드 안에서 공식적인 대화가 허용되는 곳은 마운드뿐이다.현재 투수를 계속 던지게 하느냐, 다른 투수로 교체할 것이냐, 아니면 투구 패턴을 바꾸느냐. 그라운드의 최고경영자인 감독은 고민한다. 때로는 자신이 직접, 또는 참모인 투수코치를 대신 마운드에 올려 보낸다.

허용된 시간은 30초. 언어가 다른 둘 또는 셋이 가장 긴박한 순간, 가장 어려운 결정을 하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다. 치열한 신경전이 벌어진다. 코치는 대개 투수를 바꿀 생각이다. 대부분의 투수는 자신이 던지겠다고 한다. 후속 투수보다 자신이 더 잘 해낼 수 있다는 자신 또는 자만 때문이다.

언어적 장벽이 없고 위계가 분명한 한국인 코치와 선수라면 별 다른 소음 없이 합의에 이른다. 둘의 국적이 다르다면 소통은 복잡해진다. 특히 일본인 코치와 미국인 투수의 경우라면 상당한 언어적·문화적 충돌이 이뤄진다.가토 코치는 “일본인은 끊임없이 의심하고 걱정한다. 부정적인 결과를 피하기 위해 애쓴다. 미국인은 긍정적 결과부터 생각한다. 실패보다 성공의 확률을 더 크게 본다”고 분석했다. 승리라는 단일 목표를 위해 상반된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모였다. 통역원이 그들 사이에서 다리를 놓는다.

통역, 언어와 문화를 중재하다
통역원은 유니폼을 입지 않고도 마운드에 오르는 유일한 사람이다. 2000년 SK 창단 때 영어 통역원으로 입사한 김현수 매니저는 10년째 영어 통역원으로 일하고 있다. 프로야구 8개 구단 통역원 중 최선참이다. 그는 “30초 안에 중요한 의사결정이 이뤄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평소 외국인 코치와 외국인 선수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면서 서로를 파악하고 신뢰를 다지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말했다.

SK의 김성근 감독(가운데)과 글로버 투수(오른쪽), 통역원 김현수 씨가 KIA와의 한국시리즈 1차전을 앞두고 의견을 교환하고 있다.

통역원은 다른 문화와 언어의 경계에 서 있다. 외국어를 쓰는 한국인은 중심을 잡기부터 어렵다. 김 매니저는 “2007년 김성근 감독이 부임했을 때 대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내가 감독께 할 말을 못하니까 내가 관리하는 미국인 선수들도 그렇게 되더라. 평소 커뮤니케이션이 되지 않으니 나중에 문제가 터졌다”고 회고했다.로마노는 빠른 템포로 투수를 교체하는 김 감독에게 불만이 많았다. 코치가 마운드에 올라오면 로마노의 얼굴은 대화 시작 전부터 일그러졌다. 하루하루 쌓인 불만은 그해 6월 6일 LG전에서 폭발했다. 빗맞은 타구와 수비수 실책이 이어지면서 초반 실점을 하자 김 감독은 지체 없이 로마노를 교체했다.

로마노는 가토 코치와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마운드를 내려왔다. 그리고 김 감독에게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한국 문화로는 용서 받을 수 없는 항명이다. 깜짝 놀란 김 매니저가 온 몸을 던져 로마노를 막았다. 이튿날 로마노는 2군으로 떨어졌다.
김 매니저는 “큰일났다 싶었다. 동양의 문화 구조는 수직적이다. 맨 위에 감독이 있다. 김 감독은 평생을 그렇게 살아오신 분이다. 일본인 코치도 이런 조직 논리에 익숙하다. 미국에서 나고 자란 선수들은 기본적으로 수평적인 사고를 한다. 이런 괴리를 좁혀가는 것이 내 역할”이라고 했다.

언어는 수단, 목적은 승리
김 매니저는 호주에서 항공공학을 전공했다. 1999년 아시아나항공사에 입사, 조종사 연수를 받던 중 SK가 통역원을 구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시엔 영어 잘하는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하던 때였다. 대학 시절 야구클럽에서 뛰었던 그는 SK 야구단에 원서를 냈고 정직원으로 채용됐다. 현재는 통역 아르바이트를 거의 쓰지 않는다.

그라운드에서 언어는 수단이다. 목적은 야구다. 8개 구단 통역원 중 외국어 전공자는 거의 없다. 한화 이글스 이인영 대리는 한국외대 경영경제학과를 졸업했다. 2005년 대학 졸업 후 홍콩의 금융회사에 합격한 그는 한화 구단이 영어 통역을 구한다는 공고를 우연히 봤다. 한화의 열혈 팬이었던 그는 고민 없이 이력서를 냈다.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성격 까다로운 외국인 선수 비위를 맞추는 것이 통역보다 더 힘들었다. 중요한 경기에서 흠씬 얻어 맞은 투수가 마운드에서 내려오면서 “배가 고프니 경기가 끝나는 대로 스테이크를 먹을 수 있도록 식당 예약을 해달라”고 요청해 아연실색한 적도 있다.포수가 “힘을 내라”며 투수 엉덩이를 툭 치는 건 한국 선수들끼리 자연스러운 친밀감 표시다. 그러나 미국인에겐 며칠을 고민할 만한 일이었다. 어떤 미국 선수는 통역원에게 “한국에선 남자끼리 엉덩이를 만지는 의미가 뭔가”라고 심각하게 묻기도 했다. 외국 선수 2명과 한국 선수 60명이 섞이면서 일어나는 문화적 충돌을 완충하는 것도 통역원의 임무다.

통역산업의 부가가치
2004년 LG 통역원으로 일했던 전승환씨는 LG 간판타자였던 이병규와 친분을 쌓았다. 2006 시즌이 끝난 뒤 이병규가 프리에이전트(FA)가 되자 전씨가 에이전트를 맡아 주니치 입단을 도왔다. 현재 그는 주니치 홍보부 직원이다.야구단 내에서 통역원들이 창출하는 부가가치는 상당하다. 각 구단은 외국인 선수 2명에게 연간 10억원 정도를 쓴다. 연봉과 보너스를 더하면 개인당 50만 달러 정도가 소요되고 숙소와 식사, 그리고 가족이 오고 갈 수 있는 항공권 등을 제공한다. 야구단이 연간 200억원 안팎을 지출하는 것을 감안하면 비중이 크지 않다. 그럼에도 외국인 선수의 채용과 관리는 야구단의 핵심 사업이다.

국내 선수 수급은 경직돼 있기 때문에 고정변수에 가깝다. 올해 정규시즌 1위를 차지한 KIA는 뛰어난 외국인 투수들 덕을 봤다. 상위권 팀은 대부분 그렇다. 반면 외국인 선수가 부상을 입거나 말썽을 일으키면 좋은 성적을 내기 어렵다. 10억원의 활용이 200억원 사업을 좌우할 수 있다는 얘기다. 구단 내 직급에 따른 연봉(4000만원 안팎)을 받는 통역원은 해외사업팀장 역할을 맡는다.

광주=김식 기자 see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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