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니 '힘센 부통령' 개혁 이끌듯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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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인도네시아의 선택은 절묘했다. 현실과 이상을 조화시켜 타협점을 찾아간 과정은 인도네시아인들에겐 한편의 드라마였고 외국인들에게는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20일의 대통령 선출 과정은 메가와티로 대표되는 민주개혁세력과 골카르당으로 대표되는 보수안정세력의 대결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골카르당의 내분으로 현직 대통령 하비비가 갑작스럽게 후보를 사퇴하면서 성격자체가 바뀌어버렸다. 양 세력의 대결을 조정하는 과도기적 관리자를 선출하는 과정이 돼버린 것이다. 그 때문에 실질적인 세력기반이 없는 와히드가 대통령에 선출됐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21일의 부통령 선출 과정이야말로 신.구세력이 정면으로 맞붙는 대결의 장이 될 것으로 예상됐다.

메가와티가 또다시 싸움터로 달려나갔고 집권 골카르당의 악바르 탄중 당수와 위란토 국방장관 등 구세력도 부통령 후보로 나섰다.

그러나 투표가 세 시간이나 늦춰지는 막후협상을 통해 탄중과 위란토는 후보를 자진사퇴했다. 구세력이 패배를 스스로 인정하고만 셈이다.

메가와티가 부통령이 될 수 있도록 구세력이 길을 터준 것은 우선 메가와티의 지지자들이 벌이는 대규모 시위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간선제라는 특수성을 이용해 구세력들이 메가와티의 대통령 당선은 막을 수 있었지만 부통령 선출까지 차단하기는 어렵다고 본 것이다.

현지의 전문가들은 메가와티가 부통령에 당선되지 않을 경우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고 '체제 안에서의 점진적인 변화' 를 허용하지 않는 폭발적인 상황으로 치닫게 될 것이라고 경고해 왔었다.

20일 하비비의 후보 사퇴로 메가와티의 대통령 당선이 유력해진듯 했을 때 치솟던 주가와 루피화의 가치가 와히드의 선출과 함께 다시 원점으로 주저앉은 것도 구세력의 목덜미를 잡았을 것으로 보인다.

막무가내로 밀어붙였다가는 가뜩이나 취약한 인도네시아 경제에 대한 국제적 신뢰를 한꺼번에 무너뜨리게 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번 대선의 전체적인 과정은 어느 쪽의 승리로 돌아간 것일까. 각 정당들의 이합집산 과정에서 어부지리로 당선된 와히드가 상징적인 대통령에 그칠 것이며 메가와티가 인도네시아 정치의 명실상부한 무게중심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는 민주개혁세력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와히드를 대통령에 미는 대가로 몇 개의 각료직과 '명예로운 퇴장' 을 보장받은 것으로 알려진 골카르당 등의 구세력도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의 결과를 얻어냈다고 할 수 있다.

일괄퇴진이라는 국민들의 압력 속에서도 새 정부의 대통령에 자신들의 입장을 반영해 줄 수 있는 인물을 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양측 모두 승리를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상징적 대통령과 실세 부통령이 앞으로 얼마나 조화를 이루면서 인도네시아 개혁의 실마리를 풀어나갈 것이냐 하는 점이다.

두 사람은 우선 수하르토 전 대통령 일가의 부패사건에 대한 수사재개 문제부터 갈등을 빚을 소지가 있다.

그러나 이번 대선 과정에서 인도네시아의 신.구 정치세력은 군부의 정치참여 축소와 부패척결이라는 국민적 열망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현실인식을 보여줬다. 따라서 속도에는 이견이 있을지 모르나 근본적인 개혁 추진이라는 대세는 누구도 거스르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장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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