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기쁨] 서울 노원구 상계1동 전숙자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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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얼마 전 아이들과 시골 친정집에 갈 일이 생겼다. 남편이 바빴기 때문에 혼자 아이 셋을 데리고 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좁은 승용차보다는 기차가 좋을 것 같아 표를 예매했다. 하지만 막상 기차에 오르니 좌석이 다 찬 것은 물론 서서 가는 사람들도 여간 많지 않았다.

입석표를 사 서서 가는 사람들을 보고 2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가 문득 떠올랐다. 서울 사는 자식들이 보고 싶어 칠순노인이 덜컥 상경길에 오르셨다.

그런데 좌석표가 매진이라 할 수 없이 입석을 끊으셨다고 했다. 열차가 광주역을 출발하고도 비어있는 좌석이 하나 있어 아버지는 '좌석 주인이 올 때까지 잠깐이라도 앉아가야지' 하고 그 좌석에 앉으셨단다.

하지만 기차가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좌석주인은 나타나질 않았다. 주위에는 서서 가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아무튼 목적지인 영등포역까지 오시게 됐다.

아버지는 내리시려다가 아까부터 옆에 서있던 청년에게 "젊은이, 난 여기서 내리는데 서울역까지 가려면 잠깐이라도 앉아가지" 하고 말을 건네셨다.

그랬더니 그 젊은이가 빙그레 웃으면서 하는 말이 "어르신, 편히 오셨습니까. 실은 어르신께서 앉아계신 자리가 제 자리였습니다" 라고 '태연하게' 말하더라는 것이다.

그때 아버지는 너무 놀라고 미안하고 감격해,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뭉클함이 가슴속에서 치솟아오르더라고 하셨다.

"그럼 어디서 타서 이렇게 서서 왔소" 하니 광주 다음역인 장성역에서 탔다는 것이다. 장성에서 서울까진 얼마나 먼 거리인가. 무궁화호로도 4시간이 훨씬 넘게 걸린다.

아버지는 그런 젊은이들이 있어서 이 사회의 앞날이 밝을 것임을 확신하셨다고 하면서 우리보고도 항상 나보다 힘들고 약한 사람들을 생각하라고 두고두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기차를 타고 가면서 새삼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그 젊은이에게 아버님을 대신해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전숙자<서울 노원구 상계1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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