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546.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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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제12장 새로운 행상 (24 )

다혈질의 사내는 뭔가 주저하다가 단념한 듯 한길을 향해 걸음을 옮겨 놓았다. 그러나 십여미터를 걷다가 다시 시신 곁으로 되돌아왔다.

구둣발로 시신이 하늘로 향하도록 뒤집었다.

물끄러미, 그리고 무표정하게 다시 한 번 태호의 죽음을 확인하는 듯했다.

태호로부터 반격당할 여지가 전혀 없다는 것까지 확인한 그는 비로소 눈을 막았던 안대와 아갈잡이한 끈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다시 시신을 뒤집어 뒷결박을 풀고난 다음, 시신을 사살현장에서 20여미터나 떨어진 후미진 곳까지 끌고갔다.

권총을 발사한 다음 현장을 떠났던 사내가 비닐용기와 삽자루를 집어들고 다시 나타났다.

시신이 옮겨진 장소에는 냇물이 흘러내리다가 U자형으로 푹 파인 지형을 만나 물머리가 소용돌이치며 머무르는 곳이었다.

물살이 미치는 지점을 골라 삽질이 시작되었다.

작업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지반은 모두 뻘 흙이었기 때문이었다.

허리에 돌을 꿰달아 시신이 뻘 속에 반쯤 묻히도록 위치를 세심하게 조절하였다.

상류로부터 표류하던 시신인 것처럼 위장하려는 것이었다.

재빨리 작업을 끝낸 그들은 상류 쪽으로 몇 걸음 옮겨가 손과 구두에 묻은 흙과 삽자루를 말끔하게 씻어냈다.

그러나 치러야 할 작업은 남아 있었다.

비닐용기 가녘이 넘치도록 물을 담아 든 두 사람은 다시 사살현장으로 돌아갔다.

우선 그 곳에 남은 핏자국들을 찾아내 물로 씻어냈다.

심지어 낙엽에 묻어 있는 조그만 핏자국의 흔적까지도 찾아내 지웠다.

현장 주변에 쓰러진 잡초와 일년생 잡목들의 잎과 가지들을 본래대로 일으켜 세웠다.

그런데도 만의 하나 범증의 꼬투리가 잡힐 흔적이라도 남았을까 고치고 뒤돌아보기를 여러번 거듭했다.

거의 완벽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까치걸음으로 한길가로 나섰다.

그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어야 할 승용차의 모습은 아직도 행방이 묘연했다.

먼데로 귀를 기울이던 그들은 길가에 있는 덩굴 숲 뒤 쪽으로 몸을 숨기고 숨을 죽였다.

몸을 숨긴 지 10여분이 흘러갔다.

피우던 담배를 비벼 끄며 다혈질의 사내가 곁에 쪼그리고 앉은 사내에게 중얼거렸다.

"넝샤위 주하오러. " (能下雨就好了:비가 왔으면 좋겠구만).

사내는 대꾸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때 멀리서부터 자동차의 소음이 가느다랗게 들려왔다.

모습을 드러낸 승용차는 그들이 타고 왔던 바로 그 승용차와 조선족 운전사였다.

그들은 재빨리 차에 올라탔다.

자리를 잡자마자 사내가 말했다.

"카이만 뎬얼. " (開慢點兒:빨리 달리지 마라).

뒷좌석을 힐끗 일별하는 조선족 사내의 신색은 무두질한 것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핸들을 잡고 있는 손조차 떨리고 있었다.

그는 현장에 있지 않고 가던 길을 내쳐 달려 시간이 제법 흐른 뒤에 현장 부근으로 되돌아왔기 때문에 살인사건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현장부재증명은 성립된 셈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거울 속 들여다보듯 눈치채고 있었다.

그들이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묻지도 않았지만, 묻는다 해서 대꾸도 않을 것이 뻔했다.

그것이 다행이기도 했다.

침묵을 지키고 있기엔 세 사내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각기 다른 상념에 잠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족 사내는 운전 중에도 사뭇 줄담배를 피워댔다.

그들이 옌지 시내로 돌아온 것은 오전 10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

내왕도 빈번하지 않은 시내 변두리길에서 하마터면 마주 달려오던 차와의 충돌을 가까스로 모면했었으나 다시 다혈질로부터 뒷덜미를 얻어 맞았다.

돈벌이를 위해 한국으로 가려했던 계획을 일찌감치 단념했었더라면 이따위 수모는 겪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는 두 사람을 씨스창 근처에 있는 주점 앞에 내려주었다.

손을 번쩍 들어보이며 술청 안으로 사라지는 그들의 눈은 여전히 충혈되어 있었다.

다혈질이 바랐던 것처럼 가을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한 것은 그 이튿날 새벽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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