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를 넘어] 4. 중국 문화대혁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9면

중앙일보가 밀레니엄 기획의 일환으로 경남대(총장 박재규)와 공동기획한 '세기를 넘어' 연재의 네번째로 중국의 '문화대혁명' 을 되돌아본다. 옛 소련을 비롯한 서구의 사회주의가 모두 몰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여전히 사회주의 국가로 남아 있다.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라는 이름으로 경제적인 차원에서는 이미 자본주의화됐지만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공산당이 지배하는 사회주의를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식 사회주의가 여전히 건재한 배경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사건이 바로 문화대혁명일 것이다. 문화대혁명을 기획하고 주도한 마오쩌둥(毛澤東)이라는 인물을 통해 중국식 사회주의의 단면을 살펴본다.

문화대혁명(문혁)의 중심이었던 베이징(北京)대 캠퍼스 한 구석. 33년 전 혁명의 불을 지핀 대자보가 붙었던 자리에 낡은 게시판이 서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대자보 대신 영어.컴퓨터 관련 특강을 알리는 벽보와 일자리를 찾는 대학생들의 '아르바이트 구함' 광고만 더덕더덕 붙어 있었다. 바로 옆 벤치에 앉아 책을 보고 있던 한 학생의 손에 들려있던 것도 영어책이었다.

왕허(王鶴.21.회계학)는 "요즘은 영어를 잘 해야 좋은 자리에 취직할 수 있다" 며 깨알같은 글씨의 단어장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앉아있는 바로 그 자리가 문혁을 촉발하는 대자보가 붙었던 곳이라는 사실은 몰랐다.

王은 "역사보다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 돈을 많이 버는 것이 국가적으로 더 크게 공헌하는 것" 이라는 '선부론(先富論)' 을 주장했다. '개인이 돈을 많이 벌어야 국가가 부강해지고 인민들이 더 잘 살게 된다' 는 선부론. 자본주의와 국가사회주의가 묘하게 결합된 중국식 논리다.

린위탕(林語堂)은 중국인의 성격 중 가장 큰 특징으로 노회(老獪)함을 설명하면서 '중국인들은 연이어 혁명의 물결을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과거와 타협해 되돌아가는 것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 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오늘의 중국을 보면서 문화대혁명의 광기(狂氣)를 상상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문혁은 분명 지난 중국현대사 50년의 최대사건이었다.

문혁의 신호탄인 대자보가 베이징대에 처음 붙은 것은 66년 5월 25일. 당시 철학과의 당(黨)지서기였던 녜위안지가 베이징대 간부들과 베이징시 교육위원들을 비난하는 대자보를 붙였다.

대자보 내용이 방송을 통해 알려지면서 매일 수만명의 인파들이 캠퍼스로 밀려들었다. 6월 첫째 주까지 붙은 대자보가 5만여장, 이를 보러 몰려온 인파만 1백만명을 넘는 것으로 추정될 정도였다.

곧바로 '혁명수행을 위해' 홍위병이 조직됐고, 2개월만인 8월 18일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약 50만명(일부는 1백만명이라 주장) 의 홍위병이 천안문 광장에 모여 마오쩌둥(毛澤東)주석의 사열을 받는다.

이어 전국의 홍위병들은 네가지 과거(四舊:과거의 사상.문화.습관.풍속) 청산을 부르짖으며, 테러와 파괴를 시작했다.

당시 공식적으로 중국의 최고위직인 국가주석 류사오지(劉少奇)는 '자본주의 사상에 물들었다' 는 혐의로 홍위병에게 납치돼 폭행당한 뒤 차가운 감방에 누워 숨졌고, 그의 요리사는 '劉에게 잘못된 음식을 해줘 자본주의병에 걸리게 했다' 는 혐의로 6년간 감금됐다.

홍위병은 옛 문화의 청산을 외치며 자금성과 각종 박물관에 보관 중이던 골동품과 보물들을 부수고 불태웠다. 지식인과 전문가들은 시골로 내려가 문맹의 빈농으로부터 배울 것을 강요받았다. 대학은 모두 폐쇄됐고, 전문가들의 자리를 홍위병들이 차지했기에 공장이나 기업마저 제대로 운영될 수 없었다.

이같은 상식 밖의 일들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毛주석의 카리스마. 당시 천안문 광장에 모여 '毛주석 만세' 를 외쳤던 홍위병 출신 퇴역장성 첸(錢)씨는 문혁을 '집단 히스테리' 라 불렀다. 상하이(上海)에서 공장노동자로 일하던 錢씨는 공산당 관계자로부터 "홍위병에 가입하라" 는 얘기를 듣고 대단한 영광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당시 毛주석은 신(神)과 같은 존재였다. 무조건 그의 명령을 따르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다" 고 기억했다. 그는 毛주석의 뜻을 더 잘 수행하기 위해 혈서를 써가며 인민해방군에 자원, 시골의 작은 농촌마을에서 걸식하면서 '毛주석 어록' 을 강연하러 돌아다니기도 했다' 신성시 될 정도로 확고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던 毛주석이었지만 문혁 직전 당내에서 정치적으로 위기에 처해 있었다. 毛가 위기에 처한 것은 그가 추진했던 대약진 운동의 실패 때문이다.

중국현대사를 毛로 대표되는 이상주의적 좌파와 덩샤오핑(鄧小平)으로 대표되는 실용주의적 우파간의 대립과 갈등이라고 본다면 毛가 주도한 대약진 운동은 문화혁명의 예고편이랄 수 있다.

대약진 운동은 58년초 "15년 내에 영국을 따라잡을 수 있는 대약진 운동을 펼치라" 는 毛주석의 명령으로 시작됐다. 마르크시스트로서 毛는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를 이긴다' 고 확신했다.

그러나 동시에 '혁명의 열정이 물질적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 는 비현실적인, 비유물론적인 확신은 마르크시스트의 이론과 상반되는 중국식 세계관이었다.

毛의 명령에 따른 결과 수천만명이 굶어죽었다. 이를 비판하면서 등장한 인물이 劉와 鄧. 鄧은 '가난이 사회주의는 아니다' 며 시장경제를 도입했고, 당연히 경제는 급속히 회복됐다.

그러나 毛주석이 생각하는 사회주의는 劉.鄧의 노선과는 분명히 달랐다. 毛의 눈에 그들은 자본주의화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는 毛가 이뤄놓은 사회주의에 대한 도전이자 毛에 대한 도전이었다. 毛는 자신의 권력과 사회주의 조국을 지키기 위해 문혁의 깃발을 든 셈이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는 말로 유명한 毛는 국가 주석직을 류사오지에게 넘기면서도 군사위 주석직은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그는 해방군과 홍위병을 동원해 순식간에 권력을 다시 잡고 대륙을 흔들었다. 문혁은 그로부터 10년 뒤인 76년 그가 숨질 때까지 계속됐다.

이후 권좌에 복귀한 鄧은 문혁을 '건국이래 가장 심한 손실을 가져온 극좌적 오류' 라는 공식결론을 내렸다. 천안문 광장 기념관에 미라로 누워있는 毛는 이를 수긍하지 못할 것이다. 자신이 만든 이념과 질서가 무너지고, 그가 가장 혐오하던 빈부차와 부패가 만연한 현실을 한탄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자본주의의 문제가 계속되는 한 毛의 사회주의적 이상주의는 어떤 형식이든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심지연 교수(경남대.정치학)오병상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