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경씨 3년만의 신작 '내안의 깊은 계단' 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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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소설가 강석경(48)씨가 신작 장편 '내 안의 깊은 계단' (창작과비평사.7천5백원)을 내놨다. 인도여행의 영감 가득한 장편 '세상의 별은 다, 라사에 뜬다' 이후 3년만인 이번 작품에는 작가가 6년 전부터 살고있는 고도(古都)경주의 분위기가 흠씬 배어난다.

네 명의 주인공 중 하나인 고고학도 강주의 일터가 바로 여기. 시류에 매이지 않고 천 년 전 사람들의 흔적 하나 하나에 공을 들이는 마음 바른 남자 강주의 작업처럼 작가는 삶을 구성하는 요소들, 그 중에도 결혼과 가족제도를 둘러싼 인습의 굴레를 헤치고 들어가 삶의 본질에 대한 발굴작업을 벌인다.

강주의 이복 사촌격인 소정과 강희는 사뭇 대조적인 기질의 남매.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연극연출가 강희는 자유분방하고도 이기적인 연애를 반복하는 생활에서 짐작되듯, 자신의 욕망을 향해서만 달려가는 인물이다.

여동생 소정은 구원의 손길인 양 다가온 남자와 만난 지 두 달 만에 결혼했지만, 정작 둘의 애정은 현재 황폐하기 짝이 없는 상태다.

어머니가 '첩' 이라는 굴레를 이처럼 대조적인 방향에서 풀어내는 두 남매에 비해 의사인 아버지, 법대 출신인 어머니를 둔 강주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지반에서 출발한 삶처럼 보인다.

그러나 약혼녀 이진의 눈에 비친 강주는 "저 혼자 깊어져 가는 강, 그 강에 뛰어들어 자맥질하면서 은어도 건져올리고 숭어도 건져올리지만 바닥은 볼 수 없는 강" 같은 내면을 지니고 있다.

소설은 이들 네 사람의 삶이 운명의 힘에 얽히면서 저마다의 모색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바이올리니스트인 이진을 유학시절부터 눈여겨본 강희는 강주를 대신해 이진을 차지하게 되지만, 이진의 삶은 앞서의 많은 여자들처럼 강희가 지닌 욕망의 노획물일 따름이다.

삶의 굴레를 제대로 풀어나가는 가능성은 욕망만을 내세운 채 접근하는 남자들을 물리쳐가던 소정에게서 발견된다.

중국여행길에서 만난 일본남자 히로와의 짧지만 순전한 사랑이 그것. 작가는 줄거리를 우선 따라가려는 독자들에겐 다소 장애가 되는, 독일통일.김일성 사망같은 역사적인 사건들과 연극.고고학.음악적 지식을 활용한 장치들을 곳곳에 중첩시키면서 각각의 인물의 삶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온전히 복원해 내려한다.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고분이 없다면, 경주는 경주가 아니다" 라는 강주의 말에서 암시된다. 모처럼 서울 나들이를 한 작가는 노래방과 카페가 즐비한 도심에도, 벼베기가 한창인 논 한가운데도 수천 년 전 무덤이 현대인의 삶과 공존하는 경주의 풍경을 전하면서 "고분을 보면 절로 마음이 편해진다" 고 말한다.

"저런 고분을 보면 나도 언젠가 저 세계로 돌아가 편안히 안식하겠지 싶어서 위로가 돼" 라는 소설속 강주의 말과 통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안식에 이르기까지는 치열한 싸움을 치를 수 밖에. 방황하는 80년대 젊은이의 초상을 그린 '숲속의 방' (85)이후 자기희생적인 아내의 시선으로 도예가인 남편의 세계를 그린 '가까운 골짜기' (89), 결혼에 실패한 두 자매의 모색을 다룬 '세상의 별…' 등에서 간간히 가족제도의 상처를 그려온 작가는 "다음 작품에서는 한결 본격적으로 제도의 완곡성을 다뤄볼 계획" 이라고 밝혔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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