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왜관교 폭파의 '진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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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영화 '패튼' 의 실존인물인 미국의 조지 패튼 장군은 타이틀 롤의 조지 스콧이 영화에서 생생하게 보여준 것처럼 성격이 괴팍한데다가 '독불장군' 식의 저돌적인 작전으로 명성을 떨쳤던 인물이다.

미 제7군사령관으로 2차세계대전에 참전한 그는 정통적인 전술을 무시한 전격적 공격으로 시칠리아섬을 단숨에 장악하는가 하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완수했으며, 45년 3월에는 독일로 진격해 라인강을 돌파함으로써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패튼의 참모장이 바로 호바트 게이 장군이었다. 게이는 괴팍한 성격만은 패튼을 닮지 않았으나 저돌적인 공격성에는 호흡이 척척 들어맞았다.

부하들에게 가혹했던 패튼도 게이에게만큼은 관대했으며 전술을 펴는 데 있어서도 게이의 의견은 존중해주었다. 패튼은 군인으로서의 성향이 비슷한 게이가 자신에 못지않은 '위대한 군인' 이 돼주기를 바랐다.

과연 게이는 종전후 소장으로 진급했으며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 제1기갑사단장으로 최일선에 투입됐다.

패튼의 휘하에서 '후퇴' 를 몰랐던 게이에게 한국전쟁은 만만치 않았다. 월턴 워커 미 8군사령관이 낙동강전선에서 후퇴할 것을 명령했을 때 게이는 '후퇴작전을 어떻게 지휘해야 할는지 모르겠다' 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그러나 상관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왜관교 폭파가 후퇴작전의 클라이막스였다. 보병장교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페렌바하의 '이런 전쟁(This Kind of War)' 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게이장군은 부대가 다리를 건넌 뒤 다리를 폭파하라고 명령했으나 부대가 다 건너기도 전에 다리 위는 피란민들로 가득 찼다. 장군은 다시 부대원들로 하여금 피란민들을 밀어붙이게 한 다음 다리를 폭파하려 했으나 부대원들이 다리를 비우기만 하면 피란민들은 미친 듯이 부대원들에게 달라붙었다. 밀고 밀리는 똑같은 일이 세차례나 되풀이되고 어둠이 짙어오자 장군은 파리해진 얼굴로 '폭파하라' 고 명령했다. 수백명의 한국인이 폭파된 다리와 함께 강속으로 빠졌다. " 이 기록에는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미국에서 이 책이 출판된 것은 지난 62년인데 그렇다면 이제 와서 그 문제가 새삼스럽게 클로즈업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미 국방부의 비밀문서가 이제서야 공개됐기 때문이겠지만 이 정도로 기록돼 있다면 그것은 이미 '비밀' 이 아니다.

문제는 전쟁 중의 이런 참상들을 밝혀내기 위해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가 얼마만한 의지와 노력을 보여왔는가 하는 점이다.

반세기가 가까워 오는데도 한국전쟁의 비극은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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