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기쁨] 일본 구마모토시 체류 유학생 박진희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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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는 유학생이다. 이곳의 물가수준은 가위 살인적이어서 일본에서 여유롭게 공부하는 학생들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세계 30여개국에서 온 1백50여명의 유학생들이 공동체 생활을 하는 대학교 기숙사에 묵고 있다. 학기가 시작되는 4월과 10월을 전후해서는 많은 유학생들의 귀국.입국.이사 등으로 분주해진다.

특히 그 중에서도 사비유학생들은 일정 기간이 만료되면 민간 아파트를 찾아 이사를 해야 하는데 일본의 독특한 집세문화 때문에 한번에 목돈이 필요할 뿐 아니라 이삿짐 센터를 이용할 경우에도 만만치 않은 비용을 치러야 한다.

그날은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빗속을 뚫고 커다란 비닐봉투를 든 중국 유학생 한 명이 자전거를 타고 내 앞을 지나쳤다. 난 '분명 전날 못버린 쓰레기를 몰래 내다버리려는 걸 거야. 한심하군'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한 장면이 목격됐다. 비닐봉투를 든 그 학생에 이어 이번엔 책들이 들어 있는 봉투를 껴안은 다른 학생이 자전거로 내 앞을 스쳐갔다. 그 뒤를 이어 옷가지며 작은 살림도구를 넣은 비닐봉투를 하나씩 든 자전거 행렬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멀어지는 행렬의 끝머리를 보내고 나서야 나는 이들이 기숙사를 떠나는 친구의 이삿짐을 하나씩 날라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삿짐 차 한번만 부르면 간단하고 손쉽게 끝날 일인데 공연히 궁상을 떨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무거운 학비에 생활비조차 버거워하는 중국 유학생들의 친구를 위한 배려가 더 크게 다가 왔다.

흔히 다른 사람을 돕는다고 하면 좀더 가진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던 나에게 그날 그 모습은 세상은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것이란 사실을 깨우쳐 주었다.

일본 구마모토시 체류 유학생 박진희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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