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으로 간 '가위손 음악'…레즈너 3집 '깨지기 쉬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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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9인치의 긴 손톱(나인 인치 네일)' 이란 기괴한 예명을 쓰는 인더스트리얼 음악의 달인 트렌트 레즈너가 3집 '깨지기 쉬운(Fragile)' 을 발표했다. 2집 '하향 곡선(Downward Spiral)' 이래 5년만이다.

인더스트리얼은 기계음 샘플링과 광폭한 드럼소리로 산업사회 현대인들의 '신음과 절규' 를 표현한 음악. 영화 '가위손' 의 분위기처럼 어둡고 음울한 사운드속에 인간성 회복에의 희구가 깔려 있다.

89년 '예쁜 혐오 기계(Pretty Hate Machine)' 란 앨범으로 데뷔한 레즈너는 인더스트리얼을 장르화하고 대중화한 주인공. 10년 동안 단 두 장의 정규음반을 발표했을 뿐이지만 상처받은 목소리와 듣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는 가사로 컬트적 인기를 모았고 '방향을 잃어버린 록의 대안을 제시한 구세주' 로까지 띄워 올려졌다.

롤링 스톤, 스핀등 전문지들은 두 음반을 '90년대 가장 위대한 앨범' 목록에 올렸고 타임지는 97년 그를 '미국을 움직이는 25명' 중의 한 명으로 선정했다.

두장의 음반으로 나온 3집은 모두 23곡을 담은 대작으로 레즈너의 음악세계가 '인더스트리얼(산업)' 에서 '휴먼(인간)' 쪽으로 돌고있음을 알린 전환점에 해당한다.

5년동안 쉬며 축적한 아이디어, 벼락스타가 된 뒤 느낀 환멸감등을 쏟아부어 인간적인 음악으로 선회했다.

신디사이저나 컴퓨터 샘플링 못지않게 구식악기인 기타와 현악기를 많이 썼고 피아노 소리, 오케스트라 반주까지 집어넣었다.

그래서 한결 덜 무겁고, 덜 산업적인 대신 수려한 멜로디, 관현악과의 조화를 자랑하는 음반이 됐다.

불안하기 짝이없는 기계 파열음 같은 레즈너 특유의 테크닉이 가끔 긴장감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전작들에 비하면 소리가 훨씬 약하다.

5년전 2집 '하향 곡선' 은 어지럽고 아찔한 사운드 속에 죽음에의 자학적 충동마저 느껴졌다.

그러나 3집 '프래질' 은 다르다. 삶을 감싸주는 여유가 있다.

환희와 절망이 집요하게 교차되는 사운드 속에서 레즈너는 인간 존재의 소중함을 외치는 듯하다.

인간은 '깨지기쉬운' 이란 앨범 제목처럼 나약하지만 컴퓨터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하나뿐인 존재란 메시지다.

두장의 음반중에서 멜로디가 아름답고 곡 구성이 화려한 왼쪽음반의 매력이 두드러진다.

첫 싱글 커트곡인 '우린 여기 함께 있다(We 're in This Together)' 는 기계음의 파열과 현악기의 조화가 멋지며 '훨씬 더 깊게(Even Deeper)' 같은 곡은 레즈너의 팬이라면 며칠씩 쉬지않고 들어도 질리지않을 스타일이다.

강찬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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