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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가을아, 웬 걸음이 그리 빠르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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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색은 빨간색만이 아닙니다. 자세히 들여다보세요. 세상의 아름다운 색은 모두 다 있습니다. 반짝이는 빛의 색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그러니까 하늘이 부쩍 키가 크고 시퍼런 신록이 바래는 계절이 돌아오면 여행기자는 남모르는 시름에 잠긴다. 올가을엔 어느 단풍 명소를 소개할까, 장고의 시간이 도래해서다.

옛 기사를 넘겨 보았다. 2003년 가을엔 설악산 흘림골을 다녀왔다. 20년 만에 개방된 계곡이어서 가이드를 수배하느라 애를 먹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해 가을 한계령 고갯길은 흘림골을 찾아온 인파로 호된 정체를 빚었다. 이제 흘림골은 사람이 너무 많이 들어 다시 훼손을 걱정한단다.

지난해엔 지리산 칠선계곡을 올랐다. 10년 만에 길을 열면서 날마다 입산객 수를 정해놓은, 극소수만을 위한 코스다. 칠선계곡은, 한국에서 가장 험한 계곡이란 악명만큼 거칠고 까다로웠다. 단풍 우거진 계곡 너럭바위 위에 앉아 먹었던 도시락 맛을 여태 잊지 못한다.

고심 끝에 올해는 강원도 정선의 소금강을 먼저 골랐다. 예년만큼 험한 길도 아니고, 통행에 제한을 두는 구간도 아니다. 대신 여기는 비경이다. 큰 길에서 벗어나 있어, 그리고 아직 사람의 때를 덜 타 비경이다. 개발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비경은 급격히 감소한다. 소금강 일대는 이제 정말 몇 안 남은, 숨어 있는 경치다.

소금강 트레킹은 절벽 위를 걷는다. 소금강 줄기를 내려다보며 걷는 재미가 아찔하다. 정상 공격 산행이 아니어서, 발 아래로 가슴 내려앉는 벼랑이 내려다보여서, 벼랑 끝에 돌단풍이 애처로이 매달려 있어서 올가을 week&이 선보이는 단풍은 새롭고 또 흥미롭다.

여행기자로 맞는 가을이 회를 거듭할수록 단풍에 관한 궁금증도 늘어간다. 단풍은 본래 자연현상이다. 잎사귀의 초록 색이 붉게 변화하는 과정이 단풍이다. 하나 우리는 여느 자연현상처럼, 이를 테면 태풍처럼 단풍이 발생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단풍이 들고, 피고, 지고, 곱다고 말한다. 단풍 구경은 심지어 유희로 비견된다. 단풍놀이 말이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자연현상 앞에서 우리는 왜 이리 호들갑을 떨까. 가만히 보니 우리는, 자연의 사소한 변화에 민감한 편이다. 아침에 이슬이 맺혔다고, 저녁노을이 깊었다고, 소나기 뒤에 무지개가 떴다고, 깊은 밤 별똥별을 봤다고 우리는 웃고 떠들고 설레고 들뜬다. 자연에겐 사람을 맑게 씻기는 신통한 재주가 있나 보다. 단풍도 마찬가지일 터다.

그건 그렇고 내년엔 또 어떤 단풍을 내보여야 하나. 여행기자의 시름이 벌써 깊어진다.

글=손민호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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