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고려가요 '정석가'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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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딩아 돌아 당금에 계십니다

딩아 돌아 당금에 계십니다

이 좋은 성대에 놀고 싶습니다

바삭바삭하는 가는모래 벼랑에

바삭바삭하는 가는모래 벼랑에

군밤 닷되를 심습니다

그 밤이 움이 돋아 싹이 나야만

그 밤이 움이 돋아 싹이 나야만

덕 있는 임을 여의어 주사이다

옥으로 연꽃을 새깁니다

옥으로 연꽃을 새깁니다

그 꽃을 바위 위에 꽂아봅니다

그 꽃이 석동이 피어야만

그 꽃이 석동이 피어야만

덕 있는 내 임을 여의어 주사이다

- 고려가요 '정석가' 중

전해오는 고려속요로 3구체 6구체로 지칠줄 모르게 9연까지 뻗어나가는 절절한 사랑노래다. 그런데 군밤을 모래벼랑에 심어 거기서 싹이 돋아나야 내 사랑하는 그대 잊어도 좋겠다는 것. 옥으로 연꽃을 새겨 그 꽃을 바위에 꽂았는데 거기서 꽃이 피어나야 인품 구족한 그대 잊겠다는 것.

무쇠로 옷을 짓고 철사로 주름박아 입는 그 쇠옷이 다 닳아 없어져야 그대 잊겠다는 것. 또 무쇠로 큰 황소를 만들어 그 소가 쇠나무숲의 쇠풀을 뜯어먹어야만 잊겠다는 것, 구슬이 바위에 떨어진들 끈이야 떨어지겠느냐, 천년을 외로이 산들 그대의 믿음 어이 끊어지겠느냐는 것.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보다 더하다. 징그럽다. 징그럽다가도 이만한 영구불변의 작심이어야 하룻밤 풋사랑에도 영원이라는 것이 스며들겠다.

'딩아' 는 '징아' 이고 '돌' 은 돌이다. 옛날 금석 악기다. 정태춘이나 장사익의 노래로 불러도 썩 좋겠다. 오늘은 옛을 아주 등지지 말기를.

고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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