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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개혁신문고] 시늉뿐인 차고지 증명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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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1t 트럭 한대로 15년 동안 개인용달업을 해온 宣모 (67.서울 서부이촌동) 씨는 최근 용산역 부근 공영주차장에서 '차고지 증명서' 를 뗐다.

지난해에 이어 계약하는 구면 (舊面) 이라 보통 시세 (15만원선) 보다 약간 낮은 13만원을 주차장 관리인에게 건네줬다.

하지만 宣씨는 "올해도 또 쓸데없는데 돈을 날렸다" 는 생각에 씁쓸했다.

정작 차를 세워두지 않는데도 단순히 서류용으로 적잖은 돈을 써야 했기 때문. 그러잖아도 최근 용달업이 면허제에서 등록제로 바뀌면서 경쟁이 치열해져 한달새 일감이 40% 남짓 줄어 우울하던 터였다.

차고지 증명에 따라 밤마다 주차장에 차를 둬야 하지만 집에서 3㎞ 이상 떨어져 있는 공영주차장에 주차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宣씨는 말한다.

宣씨가 실제로 주차하고 있는 곳은 집 주변 이면도로 주차장. 시간제로 밤에는 차를 댈 수 있는 곳이지만 이런 곳은 차고지 증명 대상에 해당되지 않아 불합리하다고 宣씨는 주장한다.

차고지 증명은 사업용 자동차의 무단주차를 막기 위해 화물차.개인택시 등에 대해 의무적으로 차고지를 확보하도록 하는 제도. '여객 및 화물자동차운수사업법' 에 따라 전국의 버스.화물.택시회사는 물론 12만6천여대의 개인택시, 2만4천여대의 용달차, 2만8천여대의 개별 화물차량이 그 대상이다.

이들 차량은 차고지 증명 없이는 등록이 안될 뿐더러 다른 사람에게 명의이전도 할 수 없다.

해마다 꼬박꼬박 갱신하지 않으면 수십만원의 과태료도 물어야 한다.

아파트에 살거나 자기집 주차장이 있어 차고지 증명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업자는 수도권의 경우 절반 가량에 불과하다.

때문에 주차장들은 차고지 증명을 발급하는 대가로 한때 화물차의 경우 서울 도심은 50만원, 외곽은 30만원까지 받아 왔다.

현재는 그나마 IMF 여파로 15만~20만원 정도로 떨어졌다.

하지만 영업수익 역시 급감한 터라 상당수 사업자들은 조금이라도 더 싼 곳을 찾아 집에서 10~20㎞ 떨어진 변두리 주차장을 헤매기도 한다.

날로 심화되는 주차난을 감안하면 차고지 증명제도의 취지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제도는 현실적으로 거의 지켜지지 않는 '탁상 위의 규제' 가 되고 있다는 게 宣씨의 생각이다.

개인택시 4만3천여대, 화물 및 용달차 1만6천여대가 몰려있는 서울 시내에서도 일부 구에서는 단속하지만 대부분 구에서는 거의 단속 실적이 없을 정도로 일관성이 없다.

담당부처인 건설교통부에서는 아예 차고지 증명 위반에 대한 통계를 집계하지도 않는 등 사후관리도 소홀하다.

건교부는 애초 97년부터 6대 도시 1천9백㏄ 이상 승용차를 대상으로 이 제도를 시작, 연차적으로 범위를 확대해 오는 2000년부터 전국의 모든 차량에 대해 적용키로 했다.

그러나 산업자원부와 정치권 등의 반대로 번번이 유보해 왔다.

'자동차 내수시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거나 '저소득층의 유일한 생활수단인 자동차 소유를 원천적으로 제한할 수 있다' 는 것이 반대논리였다.

하지만 宣씨는 이해하기 어렵다.

"주차난을 유발하는 것은 자가용이나 사업용이나 마찬가지일텐데…. " 서울시용달협회 한영환 전무는 "주차면수가 차량대수를 따르지 못하는 현실에서 차고지 증명은 갖가지 편법을 낳을 수밖에 없다" 며 "전면 폐지가 어렵다면 자가 차고나 노외 주차장뿐 아니라 공유지.이면도로 주차장까지 범위를 확대해 줘야 한다" 고 말했다.

이에 대해 건교부 관계자는 "차고지 확보는 영업을 하기 위한 최소한의 기준이므로 차고지 증명제도를 아예 없애기는 어렵다" 며 "다만 차고지 인정 범위를 확대하는 방안은 장기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 고 밝혔다.

기획취재팀 = 나현철.고정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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