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우 교수 '진보평론' 창간호 비판에 대한 반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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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한국의 '좌파' 들이 다시 모여 지난달말 계간 '진보평론' 을 선보였다.

본지는 창간특집으로 '마르크시즘의 오늘과 내일' 을 꾸민 '진보평론' 이란 '창 (窓)' 을 통해 오늘날 진보진영의 실상을 짚어보았다 (본지 9월 7일자 14면) .이 일은 계명대 이진우 교수가 맡았다.

이 교수는 기본 시각에 동의하면서도 예전의 어법으로 마르크스를 다시 등장시키는 방법에 이의를 제기했다.

이교수의 비판에 대해 '진보평론' 의 총무인 이성백 교수 (서울시립대.철학)가 '해명성 반론' 을 보내왔다.

◇ "마르크시즘 부분적으로 유효"

'진보평론' 창간호에 대한 이진우 교수의 논평은 삼키기에는 너무나 쓴 혹평에 가까운 것이다.

이 혹평이 '진보평론' 에 걸었던 큰 기대가 허물어지는 '공허함' 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자기반성을 위한 따가운 질책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그가 실망한 이유는 한 마디로 말해 '진보평론' 이 다시 마르크스주의를 기치로 내걸었다는 데에 있다.

그가 들고 있는 구체적인 논지들에 대해서는 한정된 지면상 반복하지 않고, 바로 답변에 들어가도록 하겠다.

우선 '진보평론' 발간모임은 마르크스주의와 계급문제만을 고수하는 단색 모임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는 점을 분명히 해둔다.

우리 모임은 마르크스주의 내의 다양한 입장들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를 넘어선 다양한 입장들을 주장하는 회원들이 모여 이루어졌다.

다기하게 분화된 현대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제 사회문제들이 계급적 관점에서만 해결될 수 없으며, 각 문제들마다 새로운 이론적 틀이 요구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우리를 하나의 모임으로 묶고 있는 것은 현존사회의 문제들에 대해 근본적인 분석과 해결을 지향하는 '급진주의' 다.

이러한 우리의 입지를 선명히 부각시키기 위해 우리는 '좌파의 좌파' 란 표현을 사용했다.

해방의 이론과 정치의 다원성을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진보평론' 창간호를 통해서 '마르크스의 유령' 을 다시 불러내고 있다.

그 이유는 단순명쾌하다.

마르크스주의가 무엇보다도 먼저 변혁의 전망 속에서 현실 모순의 극복을 지향하는 '좌파의 좌파' 의 기호이기 때문이다.

또한 마르크스주의는 현실분석의 이론으로서 현실성을 상실한 것도 아니다.

현대사회가 계급문제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지만, 계급문제가 사라진 것도 아니다.

19세기 고전적 자본주의 시대의 역사적 산물로서 마르크스의 사상은 여러 측면에 걸쳐 '제한적인 이론' 이지만, 계급문제에 관한 한, 그리고 좌파의 좌파의 입지를 떠나지 않는 한, 마르크스의 분석은 여전히 유효하다.

문제는 그 비어있는 그릇을 신자유주의, 정보화 등 현대 자본주의의 새로운 추세에 대한 구체적 분석을 통해 채워나가는 데에 있다.

마르크스주의와 현존사회주의의 관계는 좌파의 '뜨거운 감자' 이다.

특히 이 문제는 냉전의 논리와 뒤얽혀 옳고 그름을 가리기가 지극히 어려운 부분이다.

현존사회주의 체제는 서방의 민주주의적 전통에 기반한 마르크스주의와 동방의 후진성 및 전제주의적인 문명코드와의 결합물이었다.

이런 인식이 서구와 동구 양측 지배세력에 의해 외면되어 왔던 사실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현존사회주의가 전체주의적 야만을 초래했다는 역사적 교훈을 깊이 자각하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현대 사회의 급진적인 변혁의 지향점이 민주주의의 획득에 있음을 명심하고 있다.

오늘날 자본주의가 떨치고 있는 맹위는 그것의 변혁적 전망을 매우 불투명하게 하고 있다.

그래서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표방하는 우리의 급진주의적 근본노선은 '현실의 가능성' 을 결여한 공허한 정치적 이상으로 간주될 수 있다.

우리 스스로 가까운 장래에 현대사회의 급진적인 변혁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우리는 현실성없는 이념의 공염불을 외우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또한 급진주의적인 저항을 통해 끊임없이 구체적 정세에 개입하려고 한다.

이를 통해 사회정의가 더 많이 실현될 수 있도록, 각종 억압과 차별이 더 많이 척결될 수 있도록 사회를 견인하려고 한다.

급진주의적 노선의 이러한 현실적인 기능은 이미 근대 서구의 역사가 확인해 주고 있다.

아울러 80년대의 급진주의가 90년대 한국의 민주화에 초석이 되고 있음은 재삼 강조할 필요조차 없다.

눈에 보이는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다.

우리는 사회 내부에 새로운 이념갈등의 장벽을 세우려는 것이 아니다.

현대 사회 내부에는 이미 도처에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 세워져 있다.

우리의 목적은 이 내부의 각종 장벽들을 허물려고 할 따름이다.

이성백 <서울시립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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