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감시 사회를 열린 사회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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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우리는 도처에 위험과 불안요소로 가득찬 '위험사회' 에 살고 있다.

내가 한 말이 '도청당하고' 나의 일거수 일투족이 '감시당할지 모르는' 불안한 세상에 살고 있다.

한편으로는 자율과 등권 (等權) 의 새로운 시민사회를 거론하면서도, 또다른 한편으로는 시민이 '주체로서 대접받지 못하고 객체로서 감시당하는' 모순투성이의 세상에 살고 있다.

*** 수사편의 위주로 監聽

정보통신부가 지난 13일 국회에 제출한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경찰청.국방부 등 국가 수사기관들은 올해 들어 소형 유선전화 감청장치를 1백75대나 구입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기존 6백30대의 26%에 해당하는 것으로 감청 오.남용에 대한 우려가 많이 있다.

수사기관이나 정보기관은 '감청과 도청은 범죄수사를 위해 불가피한 조치' 라고 주장하지만, 현재 국내 감청과 도청 관련 규정은 너무 수사기관 편의 위주로 만들어져 있다.

지난 상반기 동안 수사기관에 의한 긴급감청은 1백50건이며, 법원의 영장없이 감청에 들어가 36시간 이내에 감청을 끝낸 경우는 47건이나 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 감청대상 범죄 150여종

미국은 원천적으로 도청과 감청은 불법이다.

도청이 빌미가 돼 대통령까지 물러나야 할 만큼 도청에 대한 사회적 감시가 엄격하다.

일본 역시 어떠한 경우에도 도청.감청은 허용하지 않다가 최근에야 예외적으로 '집단 밀항' '조직범죄집단의 살인' '조직폭력배의 총기 사건' '마약 밀수 및 판매' 등 네가지 범죄에 대해서만 도청.감청을 허용했다.

우리나라에서 통신비밀보호법이 감청을 허용하는 범죄의 종류는 1백50여종에 이른다.

일단 웬만한 범죄수사는 다 감청을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둔 셈이다.

일본은 감청허용 범죄가 네종류로 한정돼 있는데 우리는 1백50종류나 된다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납득하기 어렵다.

감청기간 역시 단축할 필요가 있다.

현재 감청기간은 범죄수사의 경우 3개월, 국가안보인 경우에는 6개월로 되어 있는데, 감청이란 기본적으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상태인 만큼 크게 줄여야 한다.

인터넷이나 PC통신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수사 목적을 이유로 컴퓨터 통신회원들의 전자우편물을 열람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이미 정보서비스공급업체인 천리안.하이텔.유니텔.나우누리 등 4개 통신업체들은 올 상반기 동안 검찰.경찰.국가정보원 등 수사기관에 5백62건의 개인정보를 제공했다고 한다.

원래 전자우편 열람은 판사의 사전 허락 아래 이뤄져야 하나 대부분 '협조공문' 의 형식을 통해 쉽게 전자우편을 검열하고 있어 사생활 침해 가능성이 매우 크다.

사이버공간은 사용자들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개인의견과 개인정보들이 무수하게 노출돼 있는 곳이다.

이처럼 개인들의 일상적인 비밀공간을 단지 '수사' 라는 이유만으로 국가기관이 환하게 들여다 볼 수 있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이겠는가.

이제 사생활보호 문제는 침해당한 몇몇 개인들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적 공론과 합의 도출이 꼭 필요한 시점이 됐다.

이러한 '헌법적 차원의 권리' 야말로 민주시민사회에서 공론화해야 할 문제이고, 말로만 할 게 아니라 법안에 실질적으로 반영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검열.수사의 범위와 절차상에 있어 '최소한의 규제 범위' 가 어디까지인가를 명확하게 하고, 어떻게 하면 '일관성 있는' '투명한 룰' 을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 행정편의주의 끝내야

한때 우리는 '개인' 보다는 '국가' 를, '자유' 보다는 '발전' 을 앞세우던 시대를 산 적이 있다.

그러나 이제 국가권력에 의한 행정편의주의는 더 이상 용인되지 않는 시민사회가 오고 있다.

이제 불과 석달 정도 후에는 새로운 천년이 시작된다.

새로운 시대정신은 '사회 구성원들간의 진정한 신뢰와 등권을 전제로 개인의 자유와 자아실현의 가능성이 열린 사회' 를 지향해야 한다.

국민의 정부는 '자율적인 시민사회의 건설' 을 중요한 국정지표의 하나로 내세우고 있다.

이러한 국정의 비전과 이념이 더 이상 퇴색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權祈憲 경희대 교수행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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