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여기자 슬렉트 동티모르 취재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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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영국 BBC방송은 여러해 동안 동티모르를 취재해온 네덜란드 여기자 이레네 슬렉트가 딜리 현지에서 보내온 취재기를 7일 인터넷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다음은 취재기 요약.

지난 며칠 동안 총소리 때문에 제대로 잠도 못잤다.

외국 기자들도 20명만 남아 있다.

(유엔파견단) 본부 건물 근처 곳곳에서 화재가 일어나고 있다.

불을 지른 뒤 우리가 뛰쳐나가면 사살하려는 (민병대의) 의도 같다.

인도네시아인들이 딜리에 건설한 대학과 정부기관 등 모든 건물과 사회간접자본들이 차례차례 불에 타 사라지고 있다.

하늘은 연기로 온통 새까맣다.

본부에는 이제 이틀분의 식량과 식수만 남아 있다.

시내로 나갈 수도 없다.

유엔은 이런 상황에 전혀 대비하지 않았다.

민병대의 공격을 피해 이곳으로 들어온 2천여명의 주민들은 모두 자신의 가족들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른다.

다른 주민들은 교회나 성당에 숨어 있거나 보트와 트럭을 타고 고향을 등지고 있다.

나를 무엇보다 화나게 만드는 것은 현재 나를 보호해주는 유엔이다.

그들은 이러한 상황을 예상할 수 있었는 데도 주민들에게 무책임하게 투표참여를 촉구했다.

동티모르인들은 투표결과가 발표된 뒤부터 (민병대들에 의한) 진짜 폭력사태가 시작될 것을 수개월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유엔은 이러한 경고에 귀기울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학살극 예방을 위해 인도네시아군으로부터 (치안과 관련한) 권력을 미리 이양받으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민병대를 주무르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인도네시아군이다.

지금까지 딜리에서만 약 5만명이 추방됐다.

유엔은 주민의 3분의1이 피난길에 오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건물 안에는 알 만한 독립투사들을 비롯해 어린이와 여자, 노인들이 많이 있다.

사람들은 노래부르고 춤을 추면서 공포를 잊으려 애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유엔이든 어디든 간에 국제평화유지군을 파견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나는 이들이 이곳에 그대로 남겨져 학살당할까 겁난다.

이들이 도망갈 곳은 어디에도 없다.

산악지역도 안전하지 못하다.

유엔은 이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들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조차 모른 채 사람들을 내버려 두고 있다.

정리 = 김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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