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 지도가 바뀐다] 28. 한국영상문화학회 멤버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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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영상 이미지의 빅뱅 (대폭발) 과 인문학의 폐허라는 이중적 현상 속에서 오늘 이 땅의 학문과 문화는 행여 길을 빗나가지 않았을까.

아니면 그 현실에서 인문학적으로 건져 올릴 영상의 새 명제는 없을까. 한국영상문화학회 회원들은 이런 문제의식을 구체화하기 위한 작업을 하느라 지난 여름도 그리 길고 무덥지 않았다.

지난 4일 오후 대우재단빌딩 대회실에서 열린 '3D 동영상과 컴퓨터 애니메이션' (기획 : 고형석.서울대 전기공학부 교수) 워크숍 또한 워낙 진지한 토론 분위기 속에서 여느 때처럼 예정시간을 훨씬 넘어섰다.

그런가 하면 향후 매월 이어질 워크숍에 대한 멤버들의 준비작업은 강도 높게 진행되고 있다.

사실 이 모임는 작은 스터디그룹에서부터 출발했다.

태동기부터 지금까지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박광성 (도서출판 '생각의나무' 대표) 씨의 말을 옮겨와 보자.

"97년말이었다. 김동윤 (건국대 교수. 불문학).김성도 (고려대 교수.언어과학).윤형식 (전 경희대 교수. 철학).이영은 (사진작가).홍석경 (방송위원회 선임연구원). 황인뢰 (영화감독) 등이 소모임을 만들어 공부를 시작했다. 그런데 소문을 듣고 자꾸 새로운 사람들이 얼굴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본격적인 단체를 만들어 뭔가 의미있는 작업을 해야겠다는 느낌이 든 것이다. "

도정일 (경희대. 영문학).성완경 (인하대. 디자인학) 교수를 공동준비위원장으로 학회 발족준비 들어간 것은 지난해 9월. 하지만 그들은 행정적 절차보다는 지적 토대 구축에 더 열중했다.

올해 1월부터 창립 직전까지 열렸던 '동양미학의 가능성과 영상문화' '이상 (李箱) 의 시와 시각예술' '만화와 하이퍼텍스트' '오늘의 한국영화, 무엇이 문제인가' 등 네차례 워크숍은 지식사회에 화제를 뿌렸다.

김동윤 교수는 이렇게 말을 푼다.

"가장 큰 수확은 영상이라는 단어를 놓고 학제간 연구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던 점이다. 학연.지연을 떠나 순식간에 2백명 이상의 여러분야 전공자를 구성원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의 작은 사건으로 여기고 싶을 정도였다. " 말이 그렇지 학회를 창립하면서 활동 방향성을 담은 단행본 '이미지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를 펴낸 점까지 감안하면 '큰 사건' 으로 기록될 만도 했다.

도정일 공동대표에 따르면 현 시점에서 주목해야 할 사안은 바로 '복제인간의 등장 가능성' 이다.

"복제인간은 바로 인간에 대한 고전적 개념의 파괴를 의미하거나 수정을 강요하는 것이다. 여기서 인문학이 거대한 방향전환을 시도하지 않으면 자칫 절름발이 학문으로 전락할 우려가 있는데 그 전환점에 영상이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

바로 영상에 대한 시각을 단순한 매체기술로서가 아니라 문명사적 변동국면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다.

문제는 '영상 과잉' 상태. 김정란 (상지대.불문학) 교수의 말대로라면 '이미지가 존재를 집어삼키는 상황' 으로 치닫고 있을 정도다.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적 (的)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게 이미지' 이니만큼 영상문화에 존재론적 의미부여가 불가피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들이 영상.인문학의 새로운 접점을 찾아나선 이유도 여기에 있다.

관심의 폭을 공학에까지 넓히고자 하는 것은 영상이 기술을 근간으로 흘러다니기 때문에 불가피한 일이다.

한국영상문화학회 집단이 움직이는 기본 틀은 중심 활동가 그룹과 외곽 전문가 그룹으로 대별된다.

전자는 ▶영화로서의 영상 : 서정남 (경성대).유지나 (동국대) 교수 ▶미술디자인 : 정병규 (북디자이너).김민수 (전 서울대 교수) 씨 ▶설치미술 : 성완경.박신의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씨 ▶이미지의 인문학적 근간 마련 : 도정일.김동윤.김성도 교수 ▶동아시아적 전통에서 이미지의 뿌리 찾기 : 정재서 (이화여대).김근 (한양대) 교수 ▶신화적 접근 : 김정란 교수 ▶기술적 의미분석 : 고형석 교수 등이다.

이들의 둘레에 건축. 만화. 애니메이션. 미술. 신문방송학. 연극. 패션 분야의 내로라는 전문가들이 포진해 있다.

이들의 '영상에서 새로운 인문적 메시지 캐기' 는 '탈 (脫) 구텐베르크' (활자문화의 쇠퇴) 시대를 뛰어넘는 지혜를 찾고자 함이다.

하지만 활동 성과에 대해 낙관만을 할 처지는 아니다.

김동윤 교수는 "다양한 전공자들이 만나 행하는 학제간 연구가 자칫 아마추어리즘으로 빠질 우려가 있다" 고 우려의 말을 내비친다.

하지만 이들 지식인들의 밀도있는 연구작업은 멀지 않은 미래에 가치중립적인 담론을 생산해 낼 것으로 기대를 모으게 한다.

허의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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