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언대] 現 민방위론 방위 못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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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지난 8월 실시된 을지훈련은 매년 실시되는 것이지만 올해는 두 가지 점에서 예년과 달랐다.

첫째 대통령이 직접 진두지휘했다는 사실이고, 둘째 중국 정부가 이례적으로 이 훈련에 대해 문제삼고 나왔다는 것이다.

이같은 상황과 관련해 몇가지 의문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김대중 대통령이 왜 22년간의 CPX 전통을 깨면서 민방위 복장까지 정식으로 갖춰 입고 훈련을 진두지휘해 역대 최대의 위기극복 훈련이 되게 했을까. 훈련내용이 무엇이고 그 규모와 농도가 어느 정도였길래 중국 정부가 남의 나라 일에 시비를 걸고 나왔을까.

한반도가 세계에서 전쟁발발 가능성이 제일 크다고 한 CNN 보도의 배경은 무엇이며 한미연합사령관이 언론에 한반도는 휴전 이후 가장 심각한 위험에 노출돼 있다고 지적한 상황의 진실은 무엇일까. 우리가 아무리 金대통령의 대북 포용정책과 외교능력을 믿고 우리 사회가 만성 전쟁위험 불감증에 걸려 있다 하더라도 이같은 일련의 현실상황을 직시하면서 깨달아야 할 것이 있다고 본다.

하나는 한반도에서의 전쟁발발 여부가 우리 손에 있지 않고 북측과 미국의 정책결정권자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전쟁발발시 한.미 합동 정규 군사력이 북의 정규전력을 단숨에 무력화하고 제압한다 하더라도 북한은 세계1급 수준의 화학무기.생물학무기, 그리고 장거리 대포와 미사일을 보유하고 있어 이를 사용할 경우 남한 인구 4분의3 이상이 죽거나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앞으로 벌어질 전쟁양상은 전방도 후방도 없고 군인도 민간인도 구분이 없으며 도시고 시골이고 가리지 않고 폭격.폭발.독가스.병균의 공격을 무차별로 받게 되는데 이런 전쟁양상에 대비한 정부의 정책은 무엇이고 민간의 대비책은 무엇인가.

이번 을지훈련에서 적용한 위기관리 시나리오와 시민자위방재훈련, 그리고 일정지역의 피난계획안은 이런 전쟁상황에서 실효성이 있겠는가.

지금이라도 이런 점들에 대해 정부는 물론 시민 각자가 냉철하게 생각하면서 대비책과 살아날 방도를 찾아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민방위대는 우리 모두가 인정하는 바와 같이 유명무실한 조직이 돼 버렸다.

90년 노태우 정권 때 칼을 대기 시작하더니 95년 서울시장 선거시 조순 후보가 민방위 폐지를 선거공약으로 내놓으면서 결정적 축소위기를 맞았고, 급기야 97년 김영삼 정부 때 중앙정부조직상 민방위국이 민방위재난관리국으로 통폐합되면서 독립적 행정기능이 없어져 버렸다.

새 정부 들어서도 이같은 추세는 계속돼 중앙정부는 과단위로, 지방자치단체는 7급이 이끄는 계단위로 격하돼 민방위대원 명부관리와 형식상으로만 남아 있는 민방위훈련을 담당하고 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75년부터 85년 사이에 실시했던 유사시 민방위기동작전계획 및 실시훈련, 전시 대비 의무훈련, 단위지역 위기관리훈련, 단위별 전시행동요령 습득훈련, 재난시 방재활동훈련 등을 없애버려 유사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조직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정부.정치권.7백60만 민방위대원은 다같이 자성과 아울러 더 이상 쓸모없게 된 현재의 민방위대를 해체하든가, 아니면 제노릇을 하게끔 혁명적으로 다시 짜든가 해야 할 때가 됐다고 본다.

이제 너무 쇠잔해진 현재의 유명무실한 민방위대는 해체하고 새 천년에 맞는 새로운 시민방위조직을 만들도록 하자.

이규학 생명문화운동 의장. 민방위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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