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시론

과거사 정리 때 경계할 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8면

참여정부의 과거사 바로잡기로 여당의 중진들이 차례로 부모의 허물을 뒤집어쓰고 여론의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있다. 아무리 "연좌제는 아니다"라고 하지만 일단 대상이 되면 정치인으로서 그 피해는 엄청나다.

필자는 한 독립투사의 자손으로 작금의 친일청산 논란이 잘못 흘러가는 것 같아 감히 필을 들었다. 우선 마녀사냥과 같은 과거사 바로잡기는 새로운 각도에서 재검토해야 한다. 역사가에게 그 작업을 넘겨야 한다. 혹자는 말한다. "북한은 친일파를 청산했는데 우리는 못했다. 늦게나마 이를 청산해야 떳떳하지 않은가"라고. 하지만 북한은 친일파뿐 아니라 항일파도 청산했다. 혹독한 일제 치하에서 좌익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남로당 사람들, 중국 공산당의 마오쩌둥과 함께 항일 전선에서 싸웠던 연안파들, 소련에서 공산주의적 민족해방운동을 했던 사람들까지 모조리 청산했다. 북한의 김일성체제 수립에 걸림돌이 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친일진상규명법의 적용대상을 넓혀야 한다는 이유로 시행도 되기 전 개정을 서두르고 있다. 신기남 전 의장의 말대로 "잡초는 가릴 것 없이 모조리 뽑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숙청작업은 엄정한 사실 검토가 있어야 한다.

일제 치하 고시에 합격해 군수를 지낸 분들이 있다. 윤길중 선생은 강진과 무안 군수로 있으면서 제한된 조건하에서도 선정을 베풀었다. 해방 후 헌법을 기초하는 데 주도적인 작업을 했다. 하지만 일제 관리를 지냈다는 사실에 대해 속죄하기 위해 제헌의원이 되기를 사양했다. 이항녕 선생도 군수를 지냈다. 그분도 친일했다는 이유로 관리되기를 사양했다. 4.19 직후 문교차관을 일시 역임했지만 평생을 자숙한다는 뜻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글 쓰는 데 헌신했다.

참군인 이종찬 장군은 일본육사를 졸업하고 소좌로 남방에서 참전했다. 그의 조부 이하영은 을사 5적의 한 사람으로 일제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다. 그의 아버지도 작위를 세습받아 융희 황제의 시종을 지냈다. 골수 친일파인 셈이다. 하지만 이종찬은 부친이 작고하자 특전을 누릴 수 있는 작위 세습을 거절했다. 해방 후 귀국해서는 3년간 자숙하고 지냈다. 정부 수립 이후 이시영 부통령의 권고로 군문에 입대해 뒤늦게 임관했다. 6.25전쟁 중 참모총장이 된 그는 부산정치파동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 동원을 명했지만 과감하게 이를 거부해 해임됐다. 4.19 이후 혼란기에는 허정 과도내각의 국방장관으로 군을 완전 장악해 민정이양에 차질이 없도록 했다.

박정희 대통령도 만군 장교로 중국에서 해방을 맞아 광복군 제3지대(지대장 김학규)를 찾아 편입했다. 귀국한 뒤에는 역시 자숙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고향에 내려가 교사를 했다. 같이 일군에 복무했던 동료의 권유로 뒤늦게 육사 2기로 임관했지만 후배에게 항상 굴욕적인 지휘를 받아야 했다.

이들 사례는 모두를 일률적인 선으로 긋고 매도하면 안 된다는 점을 말해준다. 일제 하의 헌병이나 고등계의 끄나풀이 돼 민족을 배반하고 혹독하게 탄압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고등관리나 장교로 있으면서 고민한 사람도 있다. 우리가 인권을 존중하는 까닭은 비록 일시적인 과오가 있어도 그들이 자숙하며 인간적 가치를 찾고자 고민할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서다. 이런 너그럽고 관대한 체제가 대한민국의 정체성이다.

과거사 바로잡기라 하여 중국 문화혁명의 삼반오반(三反五反), 비림비공(批林批孔)과 같은 군중 동원으로 대상을 모독하고 탄압하는 운동의 해독은 엄청나다. 정치적으로 오염된 군중운동은 결과적으로 특정세력의 권력 독점을 강화하고, 유능한 인재를 제거하고, 국민의 단결을 저해하고, 국가 발전과 경제를 후퇴시키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중국의 문화혁명이 그 나라를 10년간 후퇴시킨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이 글에 실린 분들의 실명을 거론한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한다.

이종찬 동북아경제포럼 한국위원·전 국회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