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508.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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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제11장 조우

범인들이 차를 세우고 세 사람의 몸을 깡그리 수색하고 현금을 강탈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데 긴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는데도 도로를 지나는 차량이나 행인들의 흔적은 없었다.

게다가 옥수수 밭 속으로 사라진 안내인도 그때까지 감감 무소식이었다. 그렇다면 대낮에 그것도 길바닥에서 공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이 흉포한 범행은 안내인과 사전에 내통하여 계획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범행인지 몰랐다.

약속했던 시각보다 한 시간 이상이나 지나 나타나서 출발을 재촉했던 것도 이들 범인과 접촉하고 난 뒤의 약속 때문인지 몰랐다. 안내인은 출발하기 전 훈춘에서 러시아 국경선인 항링즈까지는 불과 9㎞의 거리였고, 그곳에서 잠행로 초입까지는 3㎞ 남짓하다고 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훈춘을 벗어나고부터 주의깊게 사위를 살펴보았지만, 변변한 도로 표지판 하나 발견할 수 없었다. 잠행로를 벗어나면 그 곳에 차를 숨기고 대기하고 있는 다른 차량으로 포시에트까지 다녀온다는 것이 안내인의 계획이었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의구심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잠행로를 이용한 밀무역은 있어왔고 당국에서도 모르지 않았으나, 변경지방의 경제에 도움이 되기에 묵인되어 왔다는 설명이고 보면, 모두 허황된 말로만 여길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그를 믿어야 했던 것은 바로 김승욱이 찾아낸 안내인이란 점이었다. 도대체 그는 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며 범인들의 태도에서 서두르는 기색을 전혀 발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호젓한 잠행로라 할지라도 빗자루로 쓸어버린 듯 내왕이 없다는 것이 안내인과의 밀통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호의 옷을 모조리 벗기고 난 범인들은 이제 차량 내부를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다른 소득이 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바로 세 사람이 타고 왔던 승용차를 몰고 세 사람이 달려왔던 길을 뒤로 하고 사라졌다.

살려달라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던 것도 자동차가 길모퉁이를 돌아가고 난 뒤, 비바람에 휩쓸린 물보라가 한길 위로 뿌옇게 떠오르던 때였다. 박봉환은 범인들이 사라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태호가 그에게로 달려갔다. 박봉환은 모잡이로 고꾸라져 있었다. 총상에서 흘러나온 피가 아니라도 비에 젖은 옷자락을 몽땅 적시고 있었다. 허벅지를 맞았기 때문에 재빨리 수습하면 생명은 건질 것 같았다.

그러나 당장 태호의 뒷결박부터 풀어야 했다. 그는 아직도 콧등을 땅에 박고 엎드린 손씨를 불렀다. 그의 대꾸가 가관이었다.

"가도 되는 거야?" "잔소리 말고 빨리 와요. " 넋이 나간 나머지 그런 대꾸가 나온 것이겠지만, 잘못 들으면 농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손씨 역시 뒷결박이 되어 있었으므로 입으로 태호의 결박을 풀어주는 데도 무척 곤욕을 치렀다. 서둘러 박봉환을 지혈시키고 안내인을 찾아나섰다.

"형이 잠들면, 그대로 죽습니다. 절대로 잠들지 않게 닦달해야 합니다. " 손씨로 하여금 박봉환을 지켜보도록 남겨두고 옥수수 밭 고랑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의 흔적을 찾아낼 수 없었다. 배설의 흔적조차 찾아낼 수 없었다. 범인들이 달아났다고 소리까지 쳐가며 갈팡질팡했지만, 전혀 기척이 없었다. 그를 반드시 찾아내야 했다. 도로표지판조차 찾아볼 수 없는 가근방의 지리에 능숙한 사람이 일행 중에는 안내인 뿐이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비바람에 부대끼는 나뭇잎 소리와 골짜기를 훑고 지나는 바람소리 뿐이었다. 드디어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지금쯤 박봉환은 이미 혼절했을지도 몰랐다. 박봉환의 안전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 일단 밭고랑을 벗어나기로 했다.

그때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신음소리가 분명했다. 신음소리를 따라가 안내인을 발견했다. 그는 아갈잡이에 손발까지 꽁꽁 묶인채 밭둑 아래에 처박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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