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엔드' 등 불륜소재 영화 충무로 제작 한창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4면

"부르주아 사회에서 불륜 (不倫) 말고 도대체 흥미로운 게 무엇이란 말인가. "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을 이끈 거장 (巨匠) 비토리오 데 시카가 한 말이다.

'자전거 도둑' (47년) 등 주로 사회성 짙은 작품을 만들던 그가 중반부터 멜로드라마로 회귀하면서 한 '변명' 이다.

소피아 로렌이 출연한 불후의 명작 '해바라기' (69년) 도 이 시기에 나왔다.

마치 데 시카를 위한 우리식의 변명인가.

급격한 산업화로 인한 물질만능주의와 가족해체 등 세기말의 징후들이 사회를 휩쓸면서 우리 영화계에도 데 시카의 그 변명이 요즘 유효하다.

영화 선각자가 갈파한 그 부르주아 시대의 불가결한 요소가 우리 영화에도 깊이 투영되고 있는 것. 이른바 '불륜영화' , 부도덕한 이 용어를 정화 (淨化) 해 표현하면 로맨스영화라고 할 만하다.

그런 작품인 '해피엔드' 와 '주노명 베이커리' 가 한창 제작 중이다.

지난해 10월 개봉돼 30~40대 중년들의 맘을 설레게 했던 이미숙.이정재 주연 '정사' (情事) 의 후속작인 셈. 제작자의 역량과 감독의 재능을 볼 때 세기말 가족.부부관계의 새로운 풍속도를 가늠할 수 있는 자리여서 관심이 간다.

'해피엔드' 는 '사로' '생강' 등 단편영화에서 한껏 역량을 뽑낸 신예 정지우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영화 '쉬리' 로 일약 정상급 스타로 성장한 최민식과 한창 연기에 물이 오른 전도연, 풋풋한 신인 주진모가 출연해 '삼각관계' 의 치정 (癡情) 극을 연출한다.

'접속' '조용한 가족' 을 만든 명필름이 제작자로 나선다.

반면 '주노명 베이커리' 는 충무로의 돈줄 구실을 하고 있는 금융자본인 삼부파이낸스의 첫 직접제작 영화다.

'구미호' 의 박헌수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최민수.황신혜.여균동.이미연이 낭만적 사중주를 변주 (變奏) 한다.

두 작품 다 사건의 발단.전개과정의 큰 축은 30대의 불륜이다.

그러나 한 때 산란했던 연애의 감정을 추스려 각자 제갈길을 택한 '정사' 가 그렇듯, 이 영화들도 부부.가족관계에 대해 눈물을 쥐어짜는 식의 상투적 결말을 거부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야한 에로영화거나 그 극단에 있는 교훈담 같은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면 무엇이 새로운가.

명필름의 심재명 이사가 말하는 '해피엔드' 의 3대 요소는 세기말 성 (性) 의 혼란이란 대전제 위에 세운 가족의 불행과 해체, 성 역할의 변화상이다.

특히 여자가 돈을 벌고 실직한 가장이 가사를 돌보는 '역할바꾸기' 는 가치전복적 의미마저 던진다.

아내의 외도를 목격한 남편 (최민식) 이 아내 (전도연) 를 결국 살해하는 데에서 가부장적 한계상황도 드러난다.

'주노명 베이커리' 는 살인이란 극단을 택한 '해피엔드' 보다는 좀더 코믹하고 낭만적인 가족관계의 신 (新) 패러다임을 제시하려 든다.

한 때 사회문제가 됐던 부부간 교환섹스 (스와핑) 처럼 자극적이거나 유희적인 섹스코드로 접근하기보다는, 남편이 아내의 낭만을 지속시켜주기 위해 얼마간의 외도를 눈감아 준다는 '순진한' 발상이 재미있다.

그런 신뢰성을 바탕으로 네사람은 본래의 제자리로 되돌아올 뿐더러 서로 친구가 된다는 데 파격이 엿보인다.

아무튼 이 작품이 개봉될 11~12월에 한국영화계는 풍부한 성담론의 장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극적인 흡입력이 강하다는 측면에서 불륜은 첨예한 쟁점이 될 만하다. 게다가 두 영화의 경우, 단순 로맨스란 장르의 틀을 깨 코미디나 미스테리.스릴러와 엮이면서 풍부한 볼거리와 재미를 줄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이 될 것 같다. " '정사' 의 프로듀서였던 영화사 봄의 오정완 대표는 이런 전망을 내놓는다.

정재왈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