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이란과 직접 협상 안 해…오바마의 대리외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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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락 오바마 미국 정부가 북핵과 이란핵 해결을 위해 두 나라에 각각 커다란 군사적·경제적 지렛대를 가진 중국과 러시아와의 협조체제를 구축한 뒤 이들을 앞세워 압박과 협상을 병행하는 외교전략을 선보이고 있다. 당구 용어 ‘스리 쿠션’에 비교할 만하다. 워싱턴 외교소식통은 “북한 문제에선 중국이, 이란 문제에선 러시아가 미국을 도와주고 있는 모양새”라며 “러시아나 중국 외교관들도 스스럼없이 그렇게 말한다”고 말했다.

오바마 정부는 세계적인 핵 비확산 목표 달성을 위해 중국·러시아와의 협조체제 구축을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부시 전 정부가 러시아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추진해오던 동유럽 미사일방어(MD) 계획을 오바마는 지난달 전격적으로 완전 폐기했다. 또 7월 말에는 중국과의 기존 고위급 경제대화를 전략·경제 대화로 격상시켜 논의 분야를 핵문제까지 확대했다. 특히 북한·이란과의 핵 협상과정에서 미국과의 양자 접촉을 최대한 자제하거나, 한계를 명백히 해 중국과 러시아가 포함된 국제 공조의 틀을 깨려 하지 않고 있다고 워싱턴 외교소식통이 전했다.

그는 “오바마 정부의 이 같은 접근은 기본적으로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제시한 ‘스마트 파워’ 외교원칙과 관련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스마트 파워 전략의 핵심에 대해 ▶일방주의에서 다자주의로의 이동 ▶전 세계적인 문제에 대한 미국의 관심 확대 ▶유엔의 기능 및 역할 확대라고 설명했다.

미국은 이 차원에서 북핵과 이란핵 협상을 위한 국제사회 틀에 중국과 러시아를 중요 파트너로 포함시켰다. 중국은 북핵 6자회담 의장국이며, 러시아는 이란 핵 ‘P5+1’회담(유엔 안전보장이사회 5개 상임이사국+독일)의 핵심이다. 그 결과 중국과 러시아가 ‘해결사’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앞줄 왼쪽)이 5일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중국 원자바오 총리와 웃으면서 악수하고 있다. 김 위원장은 원 총리와의 회담에서 6자회담 조건부 복귀 의사를 밝혔다. [조선중앙통신 제공 AP=연합뉴스]


북한의 오랜 동맹국인 중국은 최근 두 차례 고위인사의 방북을 통해 북한의 입장 변화를 끌어냈다. 북한은 다이빙궈(戴秉國) 국무위원에게 다자회담 참가 용의를, 원자바오(溫家寶) 총리에게 조건부 6자회담 수용 의사를 밝혔다. 중국은 북한에 2000만 달러의 원조를 약속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제임스 스타인버그 미 국무부 부장관은 6일(현지시간) 상원 청문회에서 “유엔의 강력한 대북 제재 결의안에 대해 중국이 반대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식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며 “중국과의 협조체제 구축으로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말했다. 또 “이란에 대해서도 이 방식이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고 밝혔다.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왼쪽)이 4일 테헤란에서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과 만나 손을 잡고 있다. 이란 정부는 IAEA에 쿰의 새 우라늄 농축시설 사찰(25일)을 허용했다. [테헤란 신화통신=연합뉴스]


러시아는 이란에 무기를 가장 많이 공급한 나라다. 부셰르 핵 원전 시설도 제공했다. 모스크바에 있는 이란연구소의 라잡 사파로프 소장은 최근 AF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러시아는 이란의 행동에 영향을 미칠 충분히 효과적인 지렛대를 갖고 있다”며 “이란이 러시아의 충고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지난달 말 이란이 제2의 우라늄 농축시설을 공개하자,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은 “(이란에 대한) 제재가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되진 않지만 상황 변화를 위한 모든 가능성이 소진되면 국제적 제재를 사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란과 오랜 전략적 관계를 맺어온 러시아가 사실상 미국 측 입장에 선 것이다. 이란은 이후 핵 협상과정에서 우라늄 농축시설 사찰을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앞으로 핵 협상과정에 따라선 러시아의 군사적 협력관계 재검토가 이란에 대한 압박카드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러시아는 2005년 이란과 맺은 S-300 방공 미사일 공급 계약을 아직 이행하지 않고 있고, 부셰르 핵 원전 시설에 대한 연료 공급을 언제든지 중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워싱턴=김정욱 특파원, 서울=유철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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