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497.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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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제11장 조우 ⑪

물그릇이 주방 앞에서 박살나는 꼴을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안주인의 거동이 수상쩍었다. 그녀는 그릇이 깨지는 소리가 가라앉고 사위가 일순 조용해질때까지 이렇다 할 동요를 보이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그녀로선 아우의 남편으로 대접해서 식당에서 늘 사용하는 스테인리스 아닌 사기그릇에다 물을 담아온 터였다. 그린 듯이 서 있던 그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박봉환에게는 눈길 한번 주는 법이 없이 얄기죽거 며 주방으로 걸어갔다.

두 남자의 시선은 쟁반접시를 가슴이 모자라도록 포개 얹고 술청으로 나타나는 그녀의 거동에 꽂혀 있었다. 쟁반을 식탁에 내려놓는가 하였더니 주걱으로 가차없이 박살내기 시작했다.

그녀와 결혼생활 십오년째인 손씨조차 아내의 돌출행동을 사전에 눈치챌 수 없었다. 주방으로 가지 않고 박봉환에게 와락 달려들어 복장거리 하며 발악을 퍼부었더라면 사태 수습은 오히려 수월했을지도 몰랐다.

애지중지하는 집기들을 스스로 박살내는 파격을 목격하게 될 줄은 참으로 상상조차 못한 일이었다. 두 남자가 속수무책으로 지켜만 보고 있었기에 그녀의 거동에는 가속도가 붙었고, 손실은 더욱 컸다. 만류에 앞서 그녀의 속셈을 읽으려 했었기 때문이었다.

왜 저럴까 하는 사이에 가지고 나왔던 쟁반을 모조리 거덜낸 그녀는 다시 주방으로 돌아섰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방에 앉아 있던 박봉환이가 용수철에 엉덩짝을 맞은 것처럼 와락 주방으로 내달아 삽시간에 그녀의 허리를 잡고 늘어지며 적선을 빌었다.

"처형요. 왜 이카니껴. 이카면 안돼요. 내가 잘못했으이 그만 고정하소. " 잡힌 잔허리를 뿌리치려 했으나 여의치 못했던 그녀는 잡힌 채로 돌아서면서 박봉환의 따귀를 눈물이 쑥 빠지게 올려붙이며 야무지게 쏘아붙였다.

"상놈의 새끼. 니한테 가정이 소중하다는 것을 가르쳐 준 사람이 누구야? 가진 것이라고는 때묻은 불알 두 쪽밖에 없다는 것을 빤히 알았으면서도 아우를 꼬시고 침 발라서 결혼시켜서 지붕 있는 집구석에서 나자빠져 잘 수 있도록 주선한 사람이 누군데? 여기가 감히 어디라고 도둑놈처럼 뛰어들어서 니 맘대로 홰를 치고, 여기가 어디라고 뛰어들어 니 맘대로 기물을 부숴? 아무리 본데없이 자란 놈이기로서니 명색이 처가집에 와서 행패를 부려? 니가 돈푼깨나 만지고 보니까 눈깔에 보이는 것이 없냐?"

"아이고 처형. 내가 백번 잘못했습니더. 우짜다보이 저지른 실숩니더. 꿇어앉아서 빌라카면 빌겠습니더. 내가 우짜다 이런 실수를 했는지 나도 모르겠습니더. 용서하이소. "

"용서 좋아하네. 니 놈을 고소 안하면 내 손구락에 장을 지져라. 그런 행패를 부리고도 날 보고 처형이라고? 이놈아 세상에 처형들 다 죽어서 씨가 말랐다. 니가 너 집구석에서 사내 행세를 대강 꾸려나간다 해서 남의 집에까지 와서 이런 포악을 저질러도 괜찮다는 법이 있는 줄 알았다면 큰 오산이다. 길을 막고 물어 봐라. 니같이 본데없는 놈이 또 있는가. 아이고 내가 눈에 명태 껍질이 덮어씌웠지 이걸 인간이라고 중신애비 노릇까지 했으니 내 눈을 내가 찌른 셈이지 남 원망할 거 없지. "

"내가 이렇게 싹싹 빌고 있는 게 안 보입니껴? 삼강오륜을 못다 배웠다캐도 처가집에 와서 행패를 부려서는 안된다카는 것을 왜 모르겠습니껴. 불각시에 저지른 행동 아이겠습니껴. 저기 있는 형님을 보디라도 용서하시고 고정하이소. "

"형님이고 나발이고 다 소용 없어. 네놈을 고소하기로 작정했다면 이젠 나 혼자여. 하기사 빛좋은 개살구라고 나 혼자된 게 언제부턴데. " "모두 내 잘못인데 형님 탓은 하지 마이소, 형님은 그 고생시런 와중에서도 삼백달러나 되는 큰 돈을 처형한테 갖다 드린다고 꼭꼭 숨겨 놓는 걸 내가 안 봤겠습니껴. "

"돈만 갖다 주면 뭘해. 지가 당연히 해야 할 짓을 감당 못할 것 같으니까 갖다 줬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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