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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대법원장 임명 '검증'은 필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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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몇 해 전 어느 미국 시사잡지에서 이런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미국을 움직이는 10대 인물이 누구인가를 묻는 조사 결과, 1위는 당연히 대통령이었는데, 연방대법원장이 3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조사를 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미국의 사법사 (司法史) 를 보면 신화적 존재로까지 추앙받는 여러 대법관들이 등장한다.

'홈스' (Homes) 와 더불어 널리 알려진 그런 인물 가운데 '카르도조' (Cardozo) 대법관이 있다.

카르도조는 홈스와 마찬가지로 법을 단순한 형식논리가 아닌 매우 현실적인 관점에서 접근했다.

그는 여러 저술도 남겼는데, 대학강연을 모은 '재판과정의 본질' 은 오늘날에도 자주 인용되는 명저로 꼽힌다.

이 책에서 '입법자로서의 판사' 라는 소제목 아래 카르도조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을 남기고 있다.

"판결을 결정짓는 요인은 논리.역사.관습.효용 및 옳은 행위에 관한 통상적 기준이다. 이 가운데 어느 것이 결정적 힘을 갖는가는 어떤 사회적 이익을 중시하느냐에 달려있다. 그런 사회적 이익 가운데 제일 중요한 것의 하나가 법은 보편적이고 공평해야 한다는 점이다.

선례를 따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보편성과 일관성이 더 이상 선 (善) 이 아니라 억압의 방편이 되는 때가 있다.

이 때에는 다른 사회적 이익인 구체적 형평성이나 그밖에 공공복리와 같은 요소들과 균형을 맞추지 않으면 안된다.

이 다른 사회적 이익들이 판사에게 새로운 출발점을 표시할 것을 명령할 때가 온다.

그 때가 언제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인생 자체로부터 알아야 한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

그같은 '인생 자체' 로부터의 결단을 통해 미국 연방대법원은 정치적.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빛나는 판결들을 남겼다.

흑인학교와 백인학교의 분리가 평등위반이라고 보면서 학교에서의 흑백통합을 가져온 1954년의 판결, 선거구 인구수의 지나친 편차가 위헌이라고 판시한 1962년의 판결은 그런 대표적 판례들이다.

우리 대법원에도 이같은 선도적 판결들을 기대할 수 있을까. 오는 9월 23일로 현 대법원장의 임기가 만료된다.

새 대법원장의 임명을 앞두고 대법원과 대한변협이 갈등을 빚고 있다는 소식이다.

헌법에는 대통령이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법원장을 임명하도록 규정돼 있는데, 변협이 이 절차에 앞서 예상 후보들을 평가, 대통령에게 추천한다는 새로운 시도를 보이고 있다.

이를 두고 대법원은 사법부 독립 침해라고 비난하는가 하면, 변협은 오히려 사법권 독립에 기여할 것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대법원장을 비롯한 법관 임명 과정에 변호사단체가 관여하는 예는 미국에서 볼 수 있다.

대통령과 상원 법사위원회는 연방법관 임명에 앞서 피지명자나 그 후보자들에 대한 자격평가를 변호사협회에 요청한다.

협회는 평가자료를 비공개로 전달한 후 인사청문회 절차를 통해 평가결과를 보고한다.

이같은 관행은 1950년대 이래 확립돼 있다.

미국에서는 변호사로서 인정받고 검증된 사람 중에서 법관이 선임된다.

그런 점에서 전체 법률직 가운데 변호사가 그 기초를 이루고 있고, 이를 '법조일원주의' (法曹一元主義) 라고 부르기도 한다.

변호사단체가 법관 임명에 관여하는 관행은 이런 배경 아래 실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비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법조일원의 전통이나 제도가 없다.

변협을 단순한 이익단체의 하나로 폄하하려는 법원측의 자세는 이런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점을 감안하더라도 대법원장 임명과정에 적극적으로 나서려는 변협의 태도를 다른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비록 법조일원의 전통은 없다고 하더라도, 종래와 같이 대법원장이나 대법관 임명이 전혀 공적 (公的) 인 검증절차 없이 이뤄져서는 안되겠고, 그러자면 현실적으로 변협이 앞장 설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다만 예상 후보자들에 대한 평가에서 더 나아가 후보추천까지 하는 것이 적절하고 현명한지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

'인생 자체' 로부터의 결단을 통한 획기적 판결들을 우리 대법원에서 볼 수 있으려면 사법부의 좀 더 개방적 자세가 필요하다.

한국을 움직이는 10대 인물 중에 대법원장이 꼽힐 정도로 법치주의에 다가서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밖으로부터의 자극이 불가피할 것이다.

양건 한양대 법대학장 헌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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