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세계화시대의 '반민특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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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국가주의는 근대세계 발전의 한 중심축이었다.

정치 - 경제 - 문화 등 문명 여러 분야의 발전을 위한 노력은 국가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그래서 국가의 주권은 세계질서를 구성하는 기본단위로 존중받았다.

재판권은 국가주권의 핵심이다.

19세기 제국주의시대에 불평등조약의 상징이 치외법권이었던 것도 재판권의 침해였기 때문이다.

자기 영토와 자기 국민에 대한 재판권의 보전은 주권국가의 기본요건이었다.

20세기 들어와 두 차례 세계대전은 국가주의의 한계를 보여준 사태였다.

따라서 전쟁의 극한상황에서는 국가주권의 의미를 제한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국제기준에 의한 전범 (戰犯) 재판의 필요가 제기됐다.

전범처벌의 원리는 1차대전때 세워졌지만 별 실효성을 발휘하지 못했고, 2차대전 후에야 본격적 전범재판이 실현됐다.

뉘른베르크와 도쿄 (東京) 의 전범재판이 얼마만큼이라도 실효성을 갖게 된 것은 미국과 소련이 주도권을 가진 까닭이라 할 수 있다.

두 나라는 전통적 유럽국가들과 달리 국가주의보다 세계주의를 지향하는 나라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대립상황으로 접어드는 두 나라의 이해관계 때문에 전범재판의 성격은 큰 왜곡을 겪었다.

소련은 전범혐의가 있는 독일 과학자들을 재판에서 빼돌렸고 미국은 마루타부대의 범죄를 은폐한 채 그 연구성과를 가져갔다.

전쟁에 공헌한 독일과 일본의 기업들이 '경제부흥' 을 위해 보호받은 것도 미 - 소대립에 대비하는 배려 덕분이었다.

한국과 같은 점령지에서도 과거청산의 방향과 기준은 두 나라의 이해관계에 좌우된 바 크다.

남북 어디서나 투철한 민족주의는 배척받았고 일제 협력자들은 이용가치에 따라 등용됐다.

자력에 의한 해방이 아니었기에 과거청산에도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세기의 끝맺음에 임해 '친일인명사전' 편찬사업이 교수 1만명의 지지서명을 받은 것은 우리 사회 지식층의 주목할 만한 움직임이다.

'제2의 반민특위' 를 표방하는 이 사업에 이토록 폭넓은 지지가 모이는 데는 50년 전 반민특위의 실패가 쳇바퀴 도는 듯한 근년의 정치적 과거청산에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안타까운 인식도 한몫 하는 것 같다.

참된 과거청산을 위한 진지한 뜻이 이만큼이라도 모일 수 있는 것은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사업이 50년 전 좌절한 반민특위의 한풀이에 그칠 수는 없다.

민족의 울타리가 무너져가는 '세계화' 의 시대에 민족정기를 세우는 이 사업에는 참으로 넓고 깊은 시야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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