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채권단에 '증권'매각 압력 배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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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지난 6일 대우그룹 채권은행의 행장들은 대우 구조조정 계획 초안을 이헌재 (李憲宰) 금융감독위원장에게 보고했다가 혼이 났다.

채권단의 초안이 지난 4월 대우그룹이 밝힌 자구계획의 골격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데다 집행도 대우에 맡기고 채권단은 측면 지원이나 감독만 하겠다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정부 의중을 너무 모른다' 는 게 李위원장의 반응이었다.

李위원장은 지난 5일 기자간담회에서 대우측이 대우증권과 ㈜대우 건설부문 매각에 반대하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 "구조조정 계획이 어떻게 나올지는 11일 두고 보면 알 것 아니냐" 고 장담해 대우증권.건설부문 매각을 재무약정에 포함시키도록 하겠다는 뜻을 이미 밝힌 터였다.

게다가 채권단의 소극적인 태도도 정부를 답답하게 만들고 있는 요인이다.

李위원장은 이날 이런 뜻을 행장들에게 강한 어조로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이에 따라 채권단의 태도도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우측은 여전히 이런 정부 입장이 오히려 구조조정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며 반발하고 있어 오는 15일까지로 돼 있는 재무약정 수정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을 전망이다.

◇ 정부, 대우증권 매각 왜 고집하나 = 무엇보다 대우문제가 터져나온 뒤 벌어졌던 서울투신운용의 환매사태가 정부 입장을 강경하게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됐다.

대우증권이나 서울투신운용이 대우 계열사로 남아 있는 한 대우문제가 꼬일 때마다 이들 두 회사가 자금난을 겪고, 그 여파가 전체 금융시장에까지 미칠 것이란 얘기다.

실제로 대우문제가 불거져 나온 지난달 19일 이후 정부가 나서 기관투자가의 환매를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서울투신에서는 전체 수탁고 13조여억원 중 1조6천억원 정도가 환매로 빠져나간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투신의 경우 한진그룹 지분이 더 많아 법률상 대우 계열사는 아니지만 이는 규정상 5대 그룹이 단독으로 투신운용사를 설립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한진을 끌어들였을 뿐 실제 경영은 대우가 맡고 있다.

따라서 이번 기회에 대우증권.서울투신과 대우의 연결고리를 끊겠다는 것이 정부의 복안이다.

정부는 현재 대우증권이나 서울투신운용이 안고 있는 대우 회사채나 기업어음 (CP) , 우회대출 등도 두 회사를 팔지 않고서는 해결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이 빚은 결국 대우가 두 회사 지분을 판 매각대금으로 갚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부는 대우로서도 대우증권이나 서울투신이 요즘 호황으로 값이 나갈 때 파는 게 유리하다고 설득하고 있다.

건실했던 대한생명이 부실 계열사에 계속 돈을 퍼주다 결국 함께 부실 금융기관이 돼 기존주주 주식을 전액 소각하게 된 과정을 잘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 채권단이 앞장서라 = 사업부문 매각은 채권단이 주도적으로 추진하지 않으면 어렵다는 게 정부 판단이다.

계열사간 출자나 지급보증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데다 일부 사업부문만 따로 떼내기 위해선 회사내 자산.부채도 정산해야 한다.

이런 일을 대우에만 맡겨 놓으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건설.PC부문 매각은 채권단이 주도적으로 나서서 계열사간 출자.지급보증의 고리를 끊어주고 필요하면 적극적으로 출자전환도 해 먼저 계열분리시킨 다음 매각에 나서야 한다고 정부는 주문하고 있다.

이를 통해 조선.건설.PC부문과 대우증권 매각을 연내 가시화시킨다는 게 정부 목표다.

굵직굵직한 매각협상이 성사돼 현금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보여줘야 대우문제가 근본적으로 풀릴 수 있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정경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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