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커스] '손발'이 '머리'를 이기는 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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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21세기를 향한 '지식정보사회' 의 꿈이 바야흐로 한국 사회에서도 무르익고 있다.

기업은 정보산업부문을 미래형 전략산업으로 분류해 투자를 집중하고 있으며, 국민들은 컴퓨터와 인터넷을 배우기에 바쁘다.

정부는 지식정보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부처마다 전담공무원을 두어 이른바 '신지식인' 을 발굴하고 있다.

지식정보사회를 향한 우리 사회의 열망은 진정 한여름의 태양처럼 뜨겁다.

그러나 지식정보사회를 향한 이러한 무조건적 열망에 앞서 먼저 묻고, 성찰해야 할 질문이 있다.

그것은 지식정보사회라는 것은 정작 무엇을 말하는가, 지식정보사회를 만들어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하자는 말인가 라는 질문이다.

가령 드러커에 의하면 지식정보사회는 '지식' 과 '정보' 가 노동이나 자본 같은 전통적 자원의 힘을 능가하면서 유일한 핵심자원으로 대두하는 사회를 말한다.

동일한 맥락에서 토플러는 '지식' 이 '권력' 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 되는 사회를 지식정보사회로 그리고 있다.

이들이 한결같이 제시하는 지식정보사회는 다름 아닌 '지식정보' 가 다른 형태의 사회적 가치, 예컨대 '돈' 이나 '권력' 의 힘을 대체하는 사회이며, 나아가 '지식정보' 가 곧 '권력' 이 되는 사회다.

한마디로 새로운 지식정보사회는 '아는 것이 힘이다' 라는 우리의 전통적 속담이 실현되는 사회이며, '손발' (근력) 보다는 '머리' (지식)에 의해 움직이고 지배되는 사회다.

'아는 것이 힘이다' 라는 지식정보사회의 고전적 이상에 비추어 볼 때, 우리 사회의 현실은 과연 어떠한가.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사회에서도 이미 오래전부터 '아는 것은 힘' 이며, '배워야 면장' 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학벌이 그만큼 소중하고 일류대학이 그처럼 중요하다.

우리나라만큼 교육열이 높고 과외가 성행하는 나라도 없다.

지식을 추구하는 배움의 길에서 한국인들은 '헝그리 정신' 으로 매진하고 있다.

자식교육을 위해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허리띠 조르고 논밭을 팔아왔는가.

이런 의미에서라면 지식정보사회의 꿈은 이미 우리 사회에서 실현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우리사회는 아는 것이 '힘' 이 아니라 도리어 '병' 이 되는 역설적인 사회다.

이 나라에서는 대학을 나오고 박사가 될 때까지는 분명 아는 것이 힘이 된다.

그러나 학교 교육이 끝나자마자 '지식' 보다는 '인맥' 이 백배 소중해지는 곳이 바로 한국 사회다.

우리나라에서 유능한 사장이 되기 위해서는 드러커나 토플러나 경영학 서적 따위를 읽고 앉아 있어서는 안된다.

책을 읽기보다는 밖으로 나가 지식 축적 대신에 정.관계에 지면을 넓히고 로비력을 키울 궁리를 해야 한다.

이 사회는 지식이나 정보나 이론에 입각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뇌물과 아첨과 인맥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사회에서 출세하고 권력 잡고 돈벌기 위해서는 '머리' 에 지식을 채우려 하기보다는, '손' 을 잘 비빌 줄 알아야 하고, '발' 을 넓힐 줄 알아야 한다.

우리 사회의 학벌에 대한 '헝그리 정신' 은 졸업하고 자리만 잡으면 '마당발 정신' 으로 탈바꿈한다.

어느 누구도 이 사회를 '지식' 이나 '실력' 이나 '능력' 에 의해 움직이는 사회라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실력' 보다는 '인간' 이 우선하며, '능력' 보다는 '관계' 가 우선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지식정보사회의 이상과 달리 '머리' 가 아니라 '손발' 에 의해 움직이고 지배된다.

바로 이런 이유로, 평생을 바쳐 외길을 걸으며 한 분야에서 지식과 경험을 진지하게 추구하는 전문가 정신과 장인 (匠人) 정신이 우리 사회에서 소멸해 가고 있다.

이제 이 땅에선 자기만의 주관적 소신을 지키며 내면적 실력을 연마하는 사람은 출세도 치부도 어렵게 됐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존경받고 출세하기는커녕 무능력하다느니 경영능력이 없다느니 하여 배척받고 고립되기 쉽다.

소신과 원칙을 가지고 살아온 사람들보다는 두루두루 원만한 인간관계만 유지하며 남들과 잘 어울리는 '세일즈맨' 타입들이 이 땅에서 인정받고 출세하고 돈벌게 됐다.

한 개인의 내면적 자질이나 업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난 스타일이 지배하는 사회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지식인' 을 뽑으며 기존의 지식인들을 경멸하는 정책 따위나 추진한다고 해서, 컴퓨터나 인터넷만을 보급한다고 해서 지식정보사회가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올바른 지식정보사회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원론으로 돌아가 아는 것이 '병'

이 아닌 '힘' 이 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실력과 능력이 인맥과 뇌물을 대체하는 사회, '손발' 이 아니라 '머리' 가 지배하는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박승관 서울대교수. 언론정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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