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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의 아픔 달래주는 ‘자연의 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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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환경부 DMZ 조사단장 김귀곤 교수가 지난달 18일 강원도 철원군 김화 남대천 일대를 조사하고 있다. [김귀곤 교수 제공]

“정해진 길(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폭) 이외에는 지뢰밭이라고 생각하시고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지난달 15일 오전 10시쯤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덕산리 비무장지대(DMZ) 안에 발을 들여놓자 키보다 훨씬 큰 억새풀이 우리를 맞았다. 풀 사이로 난 수색로는 보통 사람이 봐서는 길인지 아닌지 구분이 잘 안 된다. DMZ 생태계조사단을 안내한 육군 5사단 수색대 장교의 주의사항이 계속된다.

“최근에 비가 많이 왔습니다. 손바닥만 한 대인지뢰가 떠내려왔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도 병사들과 같은 철모를 쓰고 전투복과 방탄조끼를 입었다. 군사분계선(MDL) 인근인 남대천을 답사했던 18일에는 혹시라도 총알이 날아올까 봐 우리 모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군의 진지(GP)가 불과 850m 거리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DMZ의 한낮은 고요함을 넘어 정적마저 감돌았다. 그만큼 사람의 간섭에도 민감했다. 조사단의 작은 소리에 놀란 꿩이 철책선에 걸려 날아가지 못하고 퍼드덕거리는 모습은 안쓰러웠다.

DMZ에도 가을이 성큼 다가와 산벚나무의 잎은 벌써 붉은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지난 56년 동안 잦은 산불에 의해 DMZ 생태계는 끊임없이 교란됐지만 자연의 더 큰 힘은 사람의 흔적을 지워가고 있었다. 불이 난 산에는 떡갈나무·신갈나무 숲과 물억새·억새 초지가 발달했다. 산 계곡에는 달뿌리풀과 갈대가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원래 달뿌리풀은 물가에서 누워 포복형으로 번지는데 꼿꼿하게 서 있는 점이 독특했다.

광삼평야에서는 멀리 폐가가 어렴풋이 보였다. 폐가 주변 뽕나무는 이곳이 농촌마을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금성천 계곡의 군사분계선에는 낡은 전봇대가 옛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

국립공원연구원 오장원 박사는 수색로에 그령이 자라는 것을 보고 “옛날 논두렁에서 자라던 식물”이라며 “과거 이 일대가 논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묵논이 56년 세월 속에서 습지로 바뀌고 있다. 과거 사람들이 살면서 대규모로 농사를 지었으나 사람의 간섭이 사라지면서 자연, 혹은 반(半)자연 상태의 생태계로 돌아가고 있다. 세계에서 이곳 DMZ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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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들도 ‘특혜’를 누리고 있었다. 먹이가 풍부하고 사람의 간섭이 없기 때문이다. 중대백로가 한가로이 날아다니고, 청호반새가 눈에 띄었다. 인근 흙으로 된 절벽 곳곳에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청호반새의 둥지였다. 인근 호수에서 먹이를 조달한다.

멀리서 다른 새소리가 들렸다. 습지 속의 개개비였다. 산속에서는 꾀꼬리·박새·오목눈이·직박구리·쇠딱따구리의 소리도 들렸다. 공주대 조삼례 교수는 “철원 DMZ는 우리나라에서 따오기가 마지막으로 관찰된 지역이고, 두루미 번식지로도 중요한 곳”이라고 설명했다.

조사과정에서 능구렁이 새끼가 사마귀를 둘둘 감고 있는 희귀한 장면도 볼 수 있었다. 능구렁이는 쥐와 같은 설치류나 곤충을 잡아먹는다. 어린 능구렁이가 커다란 사마귀를 노렸다가 상처만 입은 뒤 결국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17일 오전 안개가 걷히기 시작한 민들레벌판의 연못가에서는 고라니가 풀을 뜯고 있었다. 철책선 근처에선 멧돼지가 두리번거렸다. 수색로에서는 삵·고라니·여우의 배설물과 너구리·오소리·멧돼지의 발자국이 발견됐다. 두더지·너구리 사체도 눈에 띄었다. 포유동물도 걷기 편한 길을 좋아하기는 사람과 매한가지다. 우리를 안내한 병사들은 “여우와 산양을 본 적이 있다”고 했다.

DMZ 내에는 하천변 습지와 홍수 범람 습지, 묵논 습지, 산림계곡 습지, 연못, 저수지 등이 네트워크를 이뤄 독특한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제방 없이 형성된 원시 습지는 대단히 가치가 높다. ‘DMZ 정글’이라 부를 만큼 원시림 같은 숲이 울창한 지역이 고르게 분포하고, 자연경관도 수려했다.

김귀곤 서울대 교수 (환경부 DMZ 내부 생태계조사단장, 환경생태계획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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