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극단의 시대' 탈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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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1970년 칠레대통령에 당선했다가 3년 후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목숨을 잃은 아옌데는 당시 표준으로 극히 온건한 사회주의자였다.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의 무장혁명노선이 중남미 좌익운동의 주류이던 시절 합법.점진적인 개혁을 지향한 아옌데정권은 서방진영에서도 큰 환영을 받았고, 그의 제거로 인해 미 중앙정보국 (CIA) 은 국내외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소련대사로 부임하는 길에 쿠데타를 맞아 다년간 망명생활을 한 리카르도 라고스는 아옌데의 정통 후예라 할 수 있다.

그 라고스가 사회당 대통령 후보로 연말의 선거를 앞두고 강력한 우세를 보여주고 있어, 이변이 없는 한 아옌데를 잇는 좌파 대통령이 될 전망이다.

영국에 연금 중인 피노체트의 신세와 엇갈려 금석지감 (今昔之感) 을 불러일으킨다.

라고스의 노선은 아옌데보다도 훨씬 더 온건하다.

기독민주당과 연합해 선거에 임하고 있는 라고스는 소수 극우파 외에는 반감을 일으키지 않을 만큼 유화적인 노선을 내놓으며 이렇게 말한다.

"아옌데의 사회당은 동구 (東歐) 식 경직성을 갖고 있어 국내의 광범위한 반발을 자초했다. 쿠데타의 책임을 닉슨과 키신저에게만 돌릴 수 없다.

지금의 사회당은 서방식 민주정당의 기본틀에 따라 국민의 지지를 얻으려 한다. "

칠레만의 변화가 아니다.

왕년의 공산 게릴라들은 베네수엘라와 볼리비아에서 연정에 참여하고 있으며, 엘살바도르에서는 지방자치에서 탄탄한 역할을 맡고 있다.

우루과이 사회당은 '건전한' 야당으로 한 몫을 하고 있고, 아르헨티나 사회민주당은 중도정당과의 연합으로 집권기회를 노리고 있다.

흑백론적 대립이 사라져가는 가운데 아직도 좌익게릴라가 남아 있는 것은 콜롬비아와 페루처럼 마약문제가 얽혀 있는 곳뿐이다.

냉전 종식의 바람직한 효과라 할 수 있는 일이다.

뒷마당의 좌파세력 성장에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며 극우정권 지원에 몰두하던 미국의 태도 변화가 중남미 정치분위기 변화의 열쇠였다.

이제 중남미의 많은 국가에서는 백색에서 적색까지 정치색의 폭넓은 스펙트

럼이 자연스럽게 펼쳐지고 있다.

홉스봄이 말한 '극단의 시대' 를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남한 사회는 냉전시대의 금기 (禁忌) 를 많이 벗어던지고 다양성의 시대에 꽤 접근해 왔다.

남북간의 긴장도 크게 완화됐다.

정경분리 원칙과 햇볕정책은 세계적 시대변화에 합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문제는 북한의 태도다.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제재 해제 논의가 한반도에서도 '극단의 시대' 를 벗어나는 열쇠 노릇을 얼마나 해줄까, 기대하는 마음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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