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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나현철 칼럼

‘88만원 세대’ 두 번 울리는 아파트 값 거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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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37.5년’.
도시 근로자가 평생 일하고 저축해 서울에 아파트 한 채를 사는 데 드는 시간이다. 정희수 한나라당 의원이 통계청의 가계소득 자료와 서울 아파트 평균 가격을 이용해 계산한 결과다. 2인 이상 도시 근로자 가구의 연간 소득은 평균 3915만원(올 2분기 현재), 지출을 빼고 저축할 수 있는 돈은 953만원이다. 이 액수를 정기예금 금리(연 2.3%)로 불려나가면 37.5년이 지나야 서울의 100㎡(33평형) 아파트 한 채 값(5억6000만원)이 나온다. 20대 중반에 취업한다고 가정해도 환갑이 넘어야 서울에서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얘기다.

눈높이를 ‘강남 아파트’로 높이면 사정은 더 막막해진다. 같은 면적의 아파트 평균값 10억7000여만원을 모으는 데 56.1년이 걸린다. 강남 입성의 꿈을 이루려면 재테크도 재테크지만 80세 넘게 살 수 있도록 체력부터 단단히 다져놔야 할 판이다.

물론 이 수치는 통계에 지나지 않는다. 가계는 근로소득뿐만 아니라 자산·금융소득을 벌어들인다. 통계에 잡히지 않는 이런저런 잡수입도 있다. 그렇다 해도 생활의 터전이어야 할 집을 인생의 목표로 바꿔버리는 듯한 이 수치는 충격적이다. ‘오륙도’ ‘사오정’은 기본이고 ‘88만원 세대’가 일반화된 현실에선 이렇게라도 집을 마련할 수 있으면 다행이다 싶을 정도다. 더 큰 문제는 근로소득과 집값의 격차가 갈수록 벌어지는 추세다. 최근 몇 년간 도시 근로자가 서울의 100㎡ 아파트 값을 모으려면 30년 안팎이 걸렸다. 불과 한 해 만에 이 시간이 10년 가까이 길어졌다.

얼마 전 ‘잘나가는’ 한 금융회사 CEO와 점심 식사를 한 적이 있다. 그의 두 아들은 막 삼성과 LG그룹에 취직한 상태였다. 자신이 성공한 것 못지않게 대견해하고 기뻐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아들들의 첫 월급봉투를 보는 순간 마음속에 큰 걱정이 자리 잡았다. 국내에서 가장 후하게 받는다는 월급을 다 모아도 아들들이 언제 집을 살지 아득했기 때문이다. “버는 돈만으론 불가능해 보였다”는 게 그의 토로다. 이후 그는 ‘대학교육까지만 뒷바라지한다’고 정해뒀던 자녀교육의 원칙을 지켜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빈부 차이를 떠나,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고 싶은 모든 이에게 한국의 집값은 원칙과 상식의 시험대가 돼 버렸다.

한국의 집값이 소득에 비해 지나치게 높다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다. 30년 고정금리가 대부분인 미국 등과 달리 금리 변동의 위험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는 상황에선 가계가 느끼는 부담이 더욱 크다. 그런데도 이 차이가 급격하게 벌어지고 있는 건 예삿일이 아니다. 가계의 부담을 넘어 한국 경제의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시스템 리스크를 키우기 때문이다.

이번 글로벌 경제위기뿐만 아니라 과거의 모든 경제위기는 거품(버블)을 먹고 자랐다. 1980년대 유가 급등에 편승한 텍사스 토지 투기는 90년대 초반 미국의 저축대부조합(S&L)을 줄줄이 파산시킨 원인이었다. 일본의 부동산 거품은 ‘잃어버린 10년’을 지나 ‘잃어버린 20년’으로 진행 중이다. 90년대 이후 10년간 쌓인 정보기술(IT) 버블은 2000년대 초반 세계 경제를 동반 침체에 빠뜨렸다. 한국은행은 최근 대공황 이후의 주요 경제위기를 분석한 보고서에서 ‘버블이 크고 오래될수록 일시에 찾아오는 위기의 충격이 크다’며 ‘자산 가격의 버블 가운데 특히 부동산 버블이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부터 여러 차례 집값에 대한 걱정을 피력했다. “집값이 너무 비싸다”는 직설적인 표현을 하기도 했다. 한나라당은 나름대로 ‘반값 아파트’와 보금자리주택 등 공급 확대 정책을 꾸준히 내놓고 있다. 하지만 집값은 마냥 고공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모든 가격은 적정선 이상으로 지나치게 오르는 오버슈팅과 적정선 밑으로 떨어지는 언더슈팅을 반복한다’는 경제학자 돈 부시의 이론을 시험하는 듯하다.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저금리 탓이라지만 그 속도가 너무 지나치다는 느낌이다.

집값이 무한정 오를 수 있다면 별 문제는 없다. 실물 부문의 성장에 자산효과가 가세해 또 한번의 ‘골디락스 경제’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화려한 꽃처럼 자산 버블에 기댄 호황도 길어야 10년을 넘기지 못한다.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서라도, 지금의 집값과 주택정책에 대해 큰 틀에서의 고민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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