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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명절 민족 대이동, 의외로 짧은 ‘반세기 전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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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1970년 서울역.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성이 승객들로 가득 찬 추석 귀성열차 창문으로 체면 불고하고 승차하고 있다. [71년 보도사진연감]

설과 추석, 이른바 ‘양대 명절’의 민족 대이동은 오늘날 가장 한국적인 현상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사람들은 차 안에서 주리를 틀 생각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오랜 풍습이려니 하면서 집을 나선다. 그러나 이 집단 귀성 전통이 만들어진 지는 50년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한 세기 전만 해도 보통 사람들의 추석날 일과는 아침에 차례 지내고 뒷산에 올라 성묘한 뒤 마을 사람들과 달이 기울 때까지 술 마시며 노는 것이었다. 물론 남정네들 뒤치다꺼리에 하루가 짧았던 부녀자는 예외였지만. 인구의 절대 다수가 태어난 곳에서 그대로 눌러 살다 죽던 시절에 귀성이 사회 문제가 될 리 없었다. 더구나 추석을 비롯한 명절 문화는 일제강점기에 크게 위축되었다. 일제가 한국 문화 말살 정책을 편 데다 일요일과 일본의 축일들이 전통 명절을 조금씩 흡수해 갔기 때문이다. 1923년 추석을 앞두고 한 한글 신문은 ‘추석 명절을 부흥하라’는 사설을 실어 명절 정취가 사라지는 만큼 민족의 생기도 줄어든다고 개탄했다.

추석 특별열차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21년이었는데, 이 열차는 귀성 열차가 아니라 ‘달구경(觀月) 열차’였다. 서울역에서 오후 6시30분에 출발하여 수원 서호(西湖) 임시정거장에 승객들을 내려주고 오후 11시30분에 태워왔다. 귀성 열차라는 이름은 35년에 처음 등장한다. 그런데 이 열차는 성묘객이 아니라 방학을 맞아 귀향하는 학생들을 수송했다.

추석은 광복 뒤 46년부터 임시 공휴일이 되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법정 공휴일의 자격을 얻었다. 만주나 일본, 농촌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사람도 많아졌다. 그러나 당장 귀성 문제가 불거지지는 않았다. 명절에 맞춰 고향을 찾기에는 사회가 너무 혼란스러웠다. 6·25 전쟁이 끝난 뒤 서울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었다. 전쟁 중 죽은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던 56년, 9월 19일의 추석을 나흘 앞두고 9월 15일부터 추석 임시열차가 증편 운행되었다. 이후 추석 열차 예매소 앞에 장사진이 펼쳐지고, 서울을 빠져나가는 도로 교통이 마비되는 현상이 해마다 되풀이됐다.

그러나 이 한국적 전통 문화가 오래 지속되지는 않을 듯하다. 서울 인구가 정체한 지 오래고, 서울 시민의 반 이상이 서울내기이며, 대가족이 사라지고 장묘 문화가 바뀌고 있다. 어쩌면 한 세대 뒤에는 귀성이라는 말 자체가 사라질지도 모르겠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