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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476.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9면

제10장 대박

"나도 곧장 내려가고 싶습니다만, 기왕 왔으니 저질러놓았던 일은 매듭지어야죠. " "싸게 매듭짓고 후딱 내려오랑게. " "곁에 형님 있습니까?" "형님은 또 뭐할락꼬 찾어싸? 바람 쐬러 나가뿔고 없지라이. "

"지금 밤 11시가 넘었지 않습니까?" "변선생이란 사람이 성질 나면 낮밤 가리당가. " "모두들 집에 있는 걸 보니까, 오늘 남쪽에 비 내렸군요?"

"워메 보지도 않고 딱 알아맞혔뿌렀네이. 어제 장흥장하고 보성장을 다녀와서 삭신이 녹작지근한 판에 마침 비가 와서 하루 쉬고 있으니 쪼까 탐탁지 않더라고 채근마러. "

"장흥하고 보성장은 같은 날 서지 않습니까?" "그라제. 군수는 따로 뽑았지만, 장흥 마늘시장에서 엎어지면 보성장 초입에 코닿을 만큼 가직제이 (가깝다) ." 변씨를 꼭 만나야 하겠기에 다시 걸 것을 약속하고 전화를 끊었다. 한물 때가 지난 지금에 꽃게장사로 재미를 보았다는 변창호의 말이 의아스러웠다.

이튿날 새벽이었다. 여관에서 허전한 잠자리를 보냈던 한철규의 발길은 포구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지난날에는 아침부터 북적거렸던 해안도로가 눈에 띄게 한산했다. 아예 문을 닫은 횟집들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앞다투어 조업을 나가고 텅 비어 있어야 할 그 시각의 선착장에는 채낚기와 통발 어선들이 빼곡하게 정박해 있었다. 거개가 낯선 어선들이었다.

연평도 근해에서는 남북한의 어선들이 꽃게잡이 어장을 놓고 충돌하고 있었고, 갈치와 병어 어장이 형성되는 서해 연안은 중국과 한국의 어선들이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갈치와 조기, 강다리와 병어 어장이 형성되는 제주 서남해 어장 역시 대선단을 이룬 중국 어선들이 소흑산도 주변까지 횡행하여 싹쓸이 조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조업은커녕 어족자원 자체가 고갈되고 있었다.

깔아 둔 어망을 걷으려고 나간 우리 어선의 어망을 대수롭잖게 걷어 가는 것은 물론이고, 배로 올라와 어구들까지 강탈해 가는 해상폭력이 다반사로 자행되고 있었다.

흑산도와 홍도 근해에서 잡히던 홍어가 잡히지 않고 있는 것도 모두 그런 까닭이었다. 흑산도 근해에 태풍이 불면 허겁지겁 흑산도로 피항하는 어선들 태반이 중국 어선들이란 것에서도 그 해역의 폐해를 짐작할 수 있었다.

동남해안 근해에서 형성되는 가자미 어장도 일본 어선들에 잠식당해 범접하기조차 두렵게 되었다.

급기야는 국내 어선들끼리 치고받는 어장 쟁탈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장을 잃은 서해의 어선들이 동해로 몰려들고 부산 선적의 어선들이 울산으로 몰려들어 조업을 구걸하는 시위까지 있었다.

모두가 움치고 뛸 곳이 없는 협소한 어장 탓으로 벌어진 각축이었다. 포구에 낯선 어선들이 많아진 것은 이제 막 오징어 어장이 형성되려는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주문진에도 토착 어민들이 있게 마련이고 그들은 외지 어선들의 출어를 가로막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할 일 없는 외지 어선들은 포구에 배를 매어 둔 채 아침부터 선착장 부근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방파제에는 야외용 취사도구들을 벌여놓고 끼니를 끓이고 있는 어부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끼니보다는 술 마실 해장국을 끓이기 위해서였다.

그런 애옥살이를 감내하고 있으면서도 곁을 지나치면, 한 술 뜨고 가라는 인사말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하소연에 발길이 묶일까 선뜻 조이고 앉을 수도 없었다.

죽어나는 것은 담배와 소주였다. 묵호댁이 경영하는 영동식당도 그래서 아침부터 남루한 입성의 어부들로 북쩍거렸다.

어장을 구걸하는 외지 어부들 때문에 식당은 파리를 날리지 않고 그럭저럭 꾸려가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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