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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세근의 홍콩 전망대] 속보이는 대만식 '북풍'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힘없는 국가' 가 늘 그렇듯 대만도 수사학 (修辭學) 이 무척 발달한 나라다. 대국인 중국과 미국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입장에서 '직설법' 은 금기 (禁忌) 다.

"하나의 중국 (一個中國) 은 현재가 아닌 미래의 얘기다. 그리고 양국론 (兩國論) 은 (현실을 지적한 얘기일 뿐 결코) 대만독립을 주장한 것이 아니다. "

리덩후이 (李登輝) 대만총통이 23일 리처드 부시 미국 특사와 만난 자리에서 한 얘기다.

양안을 '국가대 국가의 관계' 로 규정했던 양국론을 포기하지도 않으면서 '하나의 중국' 원칙을 다시 껴안겠다는 계산이 느껴진다.

그러나 이번 화법은 실패작이다.

이유를 보자. 양국론의 핵심은 '국가' 다.

지금까지 대만은 양안을 '통일을 앞둔 두개의 정치적 실체' 로 정의해왔다.

따라서 미완성형인 '실체' 에서 완료형인 '국가' 로의 이동은 '통일 부정' 이고, 이는 곧바로 '대만독립' 으로 이어진다.

중국이 흥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도 李총통은 '양국론 = 현재, 하나의 중국 = 미래' 식 화법을 내놓았다.

속이 뻔히 들여다 보이는 말바꾸기에 불과하다.

李총통의 말바꾸기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양국론이 처음 터져나온 지 꼭 1주일만에 "양안회담에서 '국가대 국가' 란 용어는 사용하지 않겠다" 고 선언했다.

양국론이 최고통치권자의 신념이라면 이처럼 쉽게 양보하거나 바꿀 수 있는 걸까. 96년 총선 때처럼 '북풍 (北風)' 을 유도해 여당몰표를 끌어내려고 양국론을 주장했다는 의심을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빌 클린턴 대통령이 23일 홍콩식 '한나라 두체제 (一國兩制)' 론을 양안관계에서 처음 제기하자 대만인들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통일을 정략으로 이용한 위정자 때문에 공연히 대만 국민만 혼뜨검이 나고 있는 셈이다.

대만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어쩐지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왜 그럴까.

진세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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