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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의 희망찾기] 13. 머리보다 손발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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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얼마전 대학생들과 함께 첨단 컴퓨터 기기 전시장엘 갔었다.

눈부신 정보화 기술발전에 연신 감탄하며 전시장을 돌아보던 내 발길을 우뚝 멈추게 하는 것이 있었다.

굵은 통나무를 잘라낸 나이테 가운데 올려진 금빛 반도체 칩 하나. "어 이거 반도체 칩이네. 이 조그만 게 엄청 돈 되는 거래요. " "이것도 얼마 안 가서 신개발품에 밀릴텐데 뭐. " "원시의 통나무 위에 첨단 반도체 칩이라. 디스플레이 감각이 멋진데요. " 저마다 느낀 대로 한 마디씩 하는데, 한 여학생이 심상찮은 내 표정을 살피며 물어왔다.

"이걸 보면서 떠오르는 시인의 상상력은 어떤 거예요?" 나는 상상력이라기보다 체험에서 우러나온 느낌 한 자락을 얘기했다. 저 수백년 된 통나무 나이테 하나 하나가 늘어나기까지 비바람과 눈보라의 시간을 생각했다.

그리고 저 작은 반도체 칩 속에 엄청난 기능이 축소 내장되기까지 고뇌 어린 인간의 시간을 생각해 보았다.

돌도끼에서 시작해 반도체 칩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수억년에 걸쳐 지혜와 경험을 축적하고, 연구와 실험을 이어온 것인가.

밤을 지새워 심혈을 기울인 연구자들의 한숨 소리와 거친 작업장에서 쇠를 달구고 갈아온 노동자들의 땀방울이 뜨거운 침묵으로 응축돼 숨쉬는 게 느껴졌다.

우리는 함께 저녁을 먹으며 계속해 얘기꽃을 피웠다.

한창 먹성 좋은 나이들인지라 주꾸미 볶음에 숙주나물.꼬막무침.갓김치 등 반찬 접시가 금세 바닥이 났다.

그런데 추가로 주문하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뭔가 이상했다.

"요 작은 오징어 3인분만 더 주세요" "여기 흰 나물 한 접시하고 조개 무친 것두요" . 나는 설마 하며 우리가 먹고 있는 음식 재료들을 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주꾸미는 오징어 새끼가 아니냐, 숙주나물은 흰콩에서 나는 것 같다, 꼬막은 좀 못생긴 조개, 갓김치는 무 이파리로 담근 거라고 천연스레 대답하는 게 아닌가.

나는 다시 시장바구니 들고 장보러 간 적이 있는가, 요리해서 밥상 차려본 적 있는가, 손빨래하고 집안 청소해본 적 있는가, 씨 뿌리고 풀 뽑아본 적 있는가를 물어 보았다.

다들 살래살래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나는 새삼스런 충격을 느꼈다.

나를 먹여 살리는 밥이 어디서 자라 누구의 손으로 만들어져 내 입으로 들어오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그저 동물이 먹이를 삼키는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농민이나 노동자나 새벽시장 상인들이나 살림하는 주부들에게 감사하고 존경하는 마음이 어디에서 생겨날 수 있을까. 이 뙤약볕 아래 밭고랑을 매는 농민들, 화공약품 냄새 자욱한 공장에서 땀 흘리는 노동자들을 보면 과연 무슨 생각을 할까. 저 사람들은 머리가 나빠 손발이 고생스러운 사람들이라고, 경쟁력 없는 무능력자라고 얕보는 마음이 생길 게 아닌가.

내가 먹고 입고 쓰는 것들의 생산과정에 얽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그물을 보지 못하고, 노동하는 사람의 숨결과 정성을 느끼지 못하고, 생명의 신비와 하늘의 손길을 느낄 수 없는 불구의 감성으로 살아갈 게 아닌가.

그렇게 되면 돈이 돈을 먹는 것이니 오로지 돈만 많으면 된다고 생각할 게 아닌가.

그들이 우리 사회의 지도층이 되면 성장과 효율성만 추구하는 경제논리가 판치지 않겠는가.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가 당선된 직후였다.

나는 신문에 실린 사진 한 장을 독방 벽에 붙여놓고 한동안 들여다보곤 했다.

총리공관으로 이사하는 날 블레어의 아이들이 활짝 웃는 모습인데, 한 아이는 박스를 들고 한 아이는 아빠 와이셔츠가 걸린 옷걸이를 들고 이삿짐을 옮기고 있었다.

아, 저것이 영국 노동당을 집권에 이르게 한 저력이구나. 누구나 손수 살림하고 노동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노동가치가 지도층의 몸에 배어 있는 저 건강한 생활문화의 힘! 선진국이라는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상류층 가정일수록 아이들에게 어려서부터 노동의 가치를 가르치며 자립심을 기른다지 않는가.

구두 닦기, 마당 잔디 깎기, 요리와 설거지, 집안 청소, 자동차나 집의 수리를 스스로 하도록 하고 그 땀의 대가로 용돈을 준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자신의 손발로 먹고 입고, 일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삶의 과정' 에서 성취감과 즐거움을 느끼도록 배려하는 것이야말로 차원 높은 교육이고 진정한 사랑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우리 부모들의 자식 사랑은 어떤가.

아이들을 일류대학에 보내 출세시키겠다는 일념으로 "오직 공부만 잘 해라, 다른 건 이 엄마 아빠가 대신해 주마" 하며 지성스럽게 모시고 받든다.

아이들에게 노동 안 시키고 손발에 물 안 묻히는 게 사랑인 양 착각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불치의 공주병.왕자병에 걸린 아이들은 손발도 가슴도 퇴화된 미숙아로 자라난다.

암기지식과 영어단어로 가득 찬 머리와 반짝이는 표피적 감각만이 살아 있을 뿐이다.

이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 깊은 상상력과 창조력을 뿜어내며 고난과 역경을 이겨나갈 수 있을까. 정직하게 땀 흘리고 함께 나누는 삶을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관을 지닐 수 있을까. 나는 머리만 좋은 사람들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머리보다 중요한 것은 가슴이다.

가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손발이다.

머리를 쓰면 주로 머리만 움직인다.

가슴이 움직이면 머리도 함께 움직인다.

그러나 손발이 가는 곳에는 가슴과 머리가 같이 가게 돼 있다.

그래서 사람에겐 노동하고 살림하는 일이 소중한 것이다.

실제 생활경험과 현장체험 만큼 살아있는 지식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노동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흙 힘을 받지 못한 나무처럼 쉽게 쓰러지고 만다.

삶의 현장에서 땀방울을 흘려보지 못한 사람, 고생과 시련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 힘없는 사람들의 한과 서러움을 알지 못하는 엘리트들은 그 내면의 가치 중심이 들떠 있어 언제 머리가 도는 방향으로 등을 돌릴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인간성을 평가하는 잣대, 그 사람됨과 인간의 격 (格) 을 판단하는 단 하나의 잣대를 고른다면 나는 '약자에 대한 태도' 를 들겠다.

자기보다 힘있는 사람들을 섬기고 자신과 같은 수준의 사람들과 서로 주고받는 것은 누구나 한다.

그런 '연줄잡기' 와 '패거리짓기' 가 너무도 심각해 부패와 비리의 온상이 되고 있는 게 우리 현실이다.

문제는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다.

노동하는 사람들에 대한 태도,가난한 이웃에 대한 태도, 여성과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태도, 그것이 가치관의 핵심이고 인간다움의 중심잣대가 아니겠는가.

사람 뿐 아니라 정치를 운용하는 원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노동가치와 노동운동에 대한 태도는 모든 개혁의 진정성 여부를 판단하는 기본 잣대다.

그러므로 김대중 (金大中) 정부가 역대 정권과 달라야 하는 점은 민주주의나 시장경제나 총체적 개혁이라는 추상성에 있는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사람과 삶에 관한 입장이다.

노동하는 국민 다수에 대한 태도가 어떤가, 노동가치와 노동운동에 대한 태도가 어떤가에 따라 정권의 역사적 공과가 판단될 것이다.

대검 공안부장이 파업을 유도했다는 사건에서 드러나듯 노동문제를 공안통치의 논리, 국민경제의 논리, 법질서의 논리로만 대한다면 정권교체가 무슨 의미겠는가.

노동문제는 사람의 문제이고 도덕성의 문제다.

'국민의 정부' 마저 노동운동을 탄압함으로써 노동가치를 천대한다면 땀 흘려 생산하는 대다수 국민은 차갑게 등을 돌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노동운동을 힘으로 짓눌러 노동자들의 절박한 삶을 외면한다면 우리는 정의가 무엇인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알 수 없게 되고 말 것이다.

아직도 구속돼 있는 단병호.문성현 위원장을 비롯한 구속노동자들, 노동가치와 인간 존엄을 위해 헌신한 양심수들은 하루 빨리 석방돼야 한다.

법 논리로만 따지더라도 나라 경제를 파탄으로 이끈 사람들에게 먼저 책임을 묻는 것이 형평에 맞지 않겠는가.

그것이 경제 살리기에 고통을 전담하다시피 해 온 노동자와 서민에 대한 예의고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는가.

지식정보 시대를 맞아 지적 능력과 창조적 발상을 키우는 머리는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

자유자재로 인터넷을 사용하고 세계어로 통하는 영어를 구사하기 위한 노력도 필요하다.

그러나 가슴에서 사랑과 열정을 길어 올리지 못하는 머리, 건강한 손발이 받쳐주지 못하는 머리는 앙상한 논리의 창고일 뿐이다.

밥 한 그릇, 나물 한 젓가락을 먹을 때도 이 나라 농사를 지어 바치는 구릿빛 얼굴들 앞에 감사할 줄 아는 감성, 물건 하나를 써도 현장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의 피땀어린 손길을 느끼는 감성, 그런 감성의 피가 도는 머리라야 사람다운 세상의 설계도를 그려낼 수 있을 게 아닌가.

아무리 세상이 바뀌고 좋아져도 사람은 밥을 먹어야 산다.

최신정보와 첨단 지식과 컴퓨터가 21세기를 이끌어 간다 해도 누군가는 비바람 치고 불볕 쬐는 논밭을 기며 하루 세끼 밥을 길러 밥상에 올려야 한다.

누군가는 지하막장에서 쇠를 캐고 매캐한 공장에서 제품을 생산해야 한다.

이 지구 어느 구석에선가 나 대신 누군가는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일을 몸으로 때워야만 내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기본을 건너뛰면 미래는 스스로 허물어지는 것 손발이 인간의 기본이다 노동하는 사람이 세상의 중심이다

글= 박노해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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