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아니면 '아니오' 해야지 (3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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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33) 李대통령 하야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4월 26일 하야 (下野) 성명을 내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나는 6군단장 집무실에서 李대통령 하야 기사가 실린 신문을 읽으면서 착잡한 감회에 젖었다. 사실 나는 개인적으로 李대통령과 조금은 남다르다 싶은 인연을 지니고 있었다.

육본 인사국장으로 있던 53년 11월 어느날 나는 신임 손원일 (孫元一) 국방장관으로부터 급히 상경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경비행기를 타고 와 서울 동대문밖 경마장의 임시 비행장에 내렸더니 국방부 차관용 승용차가 나와 있었다.

대기중이던 장교에게 "차관께서 어디 계시냐" 고 물은즉 그는 "姜장군님이 차관으로 발령난 걸 모르십니까" 하고 오히려 반문하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차관이라니. 그 길로 국방부로 가 孫장관을 만났다. 孫장관은 "사전에 상의도 없이 발령을 내 미안하다" 며 "내가 해군 출신이어서 차관은 육군에서 나와야 하는데 여러 사람이 姜장군을 추천하기에 발령을 냈다" 고 설명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나는 차관 할 마음이 없었다. 차관은 절반은 정무직이라 할 수 있는데 나는 이북 출신이라 정치적 기반이 없었다. 게다가 6.25 때는 뉴욕과 워싱턴에서 무관으로 근무하는 통에 군인의 꽃이라는 사단장도 아직 거치지 못한 처지였다.

내가 아무리 고사해도 孫장관은 막무가내였다. 그는 이미 발령이 난 사항이니 어쩔 수 없다면서 "내일 아침 일찍 경무대로 가 대통령께 인사를 드리자" 고 했다.

다음날 오전 9시 나는 경무대로 갔다. 孫장관이 나를 소개하자 李대통령은 "축하한다" 며 덥석 내 손을 잡고는 "어때, 자신있나" 하고 물었다. 나는 '이때다' 싶어 "자신 없습니다" 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

李대통령은 얼굴에 잠시 뜻밖이라는 표정을 짓더니 "자신 없어? 그러면 무얼 하면 자신이 있겠나" 하고 다시 물었다. 나는 "사단장을 시켜주시면 자신 있습니다" 고 대답했다.

그러자 李대통령은 옆의 孫장관에게 "사단장은 부하를 몇명이나 거느리나" 하고 물었다.

"1만5천명 정도 된다" 는 孫장관의 대답에 대통령은 "1만5천명이라, 그 자리가 아주 중요하구먼. 姜소장을 사단장으로 내보내시오" 하고 명령하듯 말했다.

孫장관이 난색을 표하자 대통령은 특유의 거침이 없는 어조로 "대통령이나 국방장관이 왜 필요해. 용감하게 일선을 지키겠다는 군인을 도와주기 위해 있는 것 아닌가. 발령은 취소하면 되는 거야. 차관을 하겠다는 사람이 많을텐데 어려울 게 뭐가 있겠소"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차관에서 갑자기 2사단장으로 발령이 났다. 국방부 기록에는 아직도 내 '10일 차관 경력' 이 남아 있다.

2사단장 재직시에도 나는 李대통령을 만난 일이 있다. 54년 정초에 일선 사단장 20명이 2개조로 나뉘어 신년하례차 경무대를 찾아갔었다. 우리 조에서는 장도영 6사단장이 선임이었다.

李대통령은 다과를 내놓고 우리들을 한번 둘러보더니 대뜸 "사단장들은 북진통일을 할 수 있는가" 하고 물었다.

나는 곁에 선 張사단장 옆구리를 '쿡' 찔렀으나 그는 꿀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었다. 할 수 없어 두번째 선임인 내가 나섰다.

"북진통일 작전 결과가 어떻게 될지 일선 사단장들이 명확한 답변을 드릴 수 없으나 저희들은 대통령 각하의 명령대로 죽을 때까지 싸울 각오는 돼 있습니다. "

그러자 대통령은 "이 세상에 죽기를 각오하고 나선다면 무엇이고 못할 일이 없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을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라고 말했다.

북진통일이 불가능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대통령이 일선 지휘관들의 정신자세가 어떠한가를 시험해보기 위해 우정 질문을 던져보는 것 같았다.

李대통령은 경무대도 자기 방식대로 물러나왔다. 대통령직을 사퇴한 李박사는 이화장 (梨花莊) 까지 걸어가겠다고 했다.

"공직을 갖지 않은 사람이 관용차를 탈 수 없다" 는 이유에서였다. 측근들의 강권으로 李박사는 대통령 전용차의 '관1호' 번호판을 가리고서야 마지못해 차에 올랐다는 것이다.

글=강영훈 전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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