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독일과 한국의 현대사 50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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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짧은 유럽여행 중에 역사적인 큰 '이사 잔치' 를 구경했다.

본이냐, 베를린이냐…. 통일 독일의 수도를 어디로 할 것이냐 하는 열띤 논쟁이 91년 6월 20일 마침내 연방의회의 표대결에서 베를린으로 결판났을 때도 나는 우연히 현장에 있었다.

당시 본의 시청 앞 광장에 운집한 시민들이 대형 스크린으로 중계방영된 의회 표결결과를 지켜보며 실망하고 애통해하던 모습을 지금도 나는 기억하고 있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올해 6월 30일. 본에서는 마지막 연방의회가 열리고, 그 '고별' 의회에서 베를린 시대의 첫 국가원수가 될 요하네스 라우 신임 대통령의 취임식이 거행되고, 이어 동서독 통일을 성취한 헬무트 콜 전임 총리의 퇴임 후 처음이자 본에서의 마지막 특별 의회연설이 있었다.

이 모든 행사와 의식을 일관한 표제어 (標題語)가 '민주주의 50년 - 본에 대한 감사' . 바이마르에서 제정된 헌법으로 탄생한 독일의 제1공화국이 불과 14년만에 히틀러의 독재체제로 전락한 비극적 과거를 아는 사람에겐 위 표제어의 함의 (含意) 는 금방 가슴에 와닿는다.

2차세계대전 패전 후 조촐한 시골도시 본에서 제정한 '기본법' 으로 탄생한 독일의 제2공화국은 지난 50년동안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일상화하고 '사회적 시장경제' 체제속에 국민생활은 복지를 누리면서 마침내 어떤 유혈참극도 없이 평화와 자유속에 통일의 위업을 성취했다는 자랑,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수도' 아닌 '수촌 (首村)' 이라 비아냥받던 본에서 이뤄냈다는 감회가 '민주주의 50년 - 본에 대한 감사' 란 표제어엔 응축돼 있었다.

21세기 '베를린 시대' 로 이사를 가는 공화국에 대한 일종의 '테스터멘트 (유언)' 처럼 여겨진 콜 총리의 기념연설에서도 '본 시대' 의 공화국은 일찍이 독일땅이 경험한 "가장 자유롭고 가장 인도적이며 가장 사회적인 국가체제" 라 평가하고 있었다.

"본은 바이마르가 아니다" 는 명제가 확인된 셈이다.

뿐만 아니라 통일되기까지의 '임시적.잠정적인 것 (provisorium)' 으로만 치부되던 본과 그의 '기본법' 은 통일이 이뤄진 후에도 궁극적.항구적인 것의 범형 (範型) 이 되고 있음이 입증된 것이다.

91년의 여름과 달리 99년 여름의 본 시민들은 어두운 표정 아닌 밝은 표정으로 수도의 베를린 이전을 축제적 분위기속에서 맞고 있었다.

그 표정에는 '본' 이 있어 비로소 '베를린' 이 있게 됐다는 자긍심, 본의 50년이 21세기 베를린 시대의 뿌리라는 자존심이 읽혀지는 듯싶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본 시민들의 과거에 대한 긍지에는 제2공화국의 베를린 시대를 맞는 독일의 대다수 시민과 대부분의 언론매체도 동조하고 있는 것 같았다.

독일 현대사의 과거에 대한 긍정적 평가엔 국민적 합의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의 과거를 떳떳하게 여기지 못하는 일보다 불행한 일이 있을까? 과거의 긍정, 과거에 대한 자랑이 무릇 행복의 씨앗이요, 힘의 원천이다.

나는 바로 지금 막이 내려가는 한국의 20세기, 특히 그의 후반 50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것은 한국사의 '대시대 (大時代)' 였다고. 만약에 우리들의 20세기가 50년전에 또는 20년전에 막을 내렸다면, 그래서 6.25 전란 중에, 혹은 광주의 참극 속에서 21세기를 맞게 됐다면 그때 우리는 얼마나 불행했을 것인가 가상해 본다.

다행히도 우리는 망국과 국토분단과 동족전쟁이라는 온갖 비운을 겪으면서도 지난 50년동안 한반도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경제발전.정치발전을 이룩하면서 산업사회.민주국가의 터전을 다져놓고 세기말을 맞고 있다.

20세기 전반기의 불운과 비극의 골짜기가 깊었다면 깊었던 만큼 후반기 50년의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비약은 높이 평가돼야 마땅할 것이다.

'국토의 분단' 이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평가해야 되는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없는 것처럼 '통일' 이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전환해준다는 확실한 보장 또한 어디에도 없다.

임시적.잠정적인 상황속에서도 훌륭한 성취는 궁극적.항구적인 것이 될 수 있다.

그러한 성취의 축적이 통일을 위한 가장 착실한 대비가 될 것이다.

20세기 한국 현대사의 긍정적 평가는 희망찬 새 세기.새 천년을 맞는 가장 긴요한 전제이기도 하다.

崔禎鎬 울산대학교 석좌교수

◇ 필자 약력

▶66세 ▶서울대 철학과.베를린 자유대 철학박사 ▶한국일보.중앙일보 논설위원 ▶성균관대.연세대 교수 ▶한국언론학회장.한국미래학회장 역임. 저서 '우리가 살아온 20세기' 편저 '멋과 한국인의 삶'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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