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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우리말로 ‘76년 삶’ 정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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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글나(=문학)의 밤을 여는 때결(=시간)이 다가오자 사람들이 밀려오는데 몰개(=파도)처럼 우르릉 소리를 내면서 밀려온다.”

백기완(76·사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자신의 ‘한살매(=한평생)’를 소리꾼처럼 엮은 자서전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나의 한살매』(한겨레출판, 480쪽, 1만6000원)를 냈다. 문장마다 운율이 살아 있는 구어체가 유려하다.

29일 서울 인사동 한 식당에서 열린 기자 간담회에선 기자들의 다소 불평 어린 질문도 나왔다. “순우리말 쓰기는 좋지만 너무 어렵다”는 것. 그의 문장엔 온통 ‘순우리말’이 넘실댄다. 사전에도 잘 나오지 않는 말이다. 백 소장은 이렇게 답했다. 이런 문장은 들어 보셨는지. “지하 주차장 청소를 시행하고자 하오니 주민 여러분은 주차를 이동해 주십시오.” 어느 날 그가 직접 목격한 아파트의 안내 게시판 글이란다. 특히 ‘주차를 이동한다’는 표현에 웃음이 터졌다. 그만큼 우리말이 혼탁해져 있다는 것이다. 공식적인 글을 쓸라치면 평소 쓰지도 않는 한자말부터 고민한다.

백 소장은 책에서 “그늘에 가려지고 땅에 묻혔던 우리 무지랭이들의 낱말들을 끄집어내려고 애썼다”고 말했다. 학자들이 어근 따지고 어원 따져서 우리말 낱말 몇 개나 만들었느냐고 꾸짖는다. “갈마(=역사)와 함께 낱말은 새로 빚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우리말은 ‘개념어’의 주축을 한자로 삼는 바람에 ‘불임(不妊)의 언어’가 돼 버렸다. 순우리말로도 개념어를 만들고 사상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동아리·새내기·새뚝이 등은 그가 만들어 널리 퍼뜨린 낱말들이다.

자서전은 한편의 동화처럼, 옛날 이야기처럼 읽히지만 그 삶은 오롯이 한국의 현대사를 담아내고 있다. 일제 강점기 배고픔과 싸워야 했던 어린 시절,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에서 멈춘 배움길, 독재 정권에 맞서 싸우던 젊은 시절과 여전히 통일운동과 노동운동에 나서고 있는 현재까지. 그는 자신을 키운 것은 밥도 글도 아니라 좌절과 절망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새벽은 한살매 어둠 속을 걷는 이의 발끝에서 열린다”고 믿는다.

백 소장이 요즘 젊은이들에게 바라는 것은 뭘까. “갈마(=역사)는 우리에게 긴장을 요구한다. 역사가 요구하는 긴장을 먹을거리로 삼는 사람은 발전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성장하지 못한다.”

배노필 기자,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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