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증상 심해지는 '오락가락 경제정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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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정부가 개인이나 기업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정책들을 불쑥 발표했다 이내 뒤집거나 거둬들이는 사례가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이같은 정부의 정책혼선은 경제정책에 대한 신뢰도를 실추시킬 뿐 아니라 당장 애꿎은 국민이나 기업에 피해를 주고 있다는 점에서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 주택정책 혼선 = 14일 하룻동안 오락가락한 주택청약제도를 둘러싼 혼선이 대표적인 사례. 주택은행은 청약통장 1순위 가입자에게 아파트 로열층을 우선 배정한다고 14일 오전 발표했고 건설교통부는 이를 '자율결정할 사항' 이라며 용인했다.

하지만 이날 오후 늦게 주택은행은 이 제도 시행을 '유보' 한다고 정정자료를 냈다. 갑작스런 방침변경에 건교부의 종용이 있었음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이때는 이미 신문.방송과 인터넷 뉴스 등을 통해 제도변경 사실이 알려진 뒤였다.

주택은행 차형근 (車炯根) 주택청약팀 차장은 "오랫동안 청약통장에 가입한 사람들이 로열층을 받지 못해 계약을 포기하는 사례가 많아 이 제도를 검토했으며, 건교부 실무진과도 협의를 마친 것" 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건교부 정락형 (鄭樂亨) 주택도시국장은 "주택은행은 주택공급에 관한 정부 업무를 대행하는 기관이다. 실무진과는 협의했을지 모르지만 국장이나 장.차관은 전혀 몰랐던 사실이며 일부 신문보도를 보고 뒤늦게 알았다" 며 "2, 3순위자들에게 로열층을 배제할 경우 분양신청률이 낮아지는 등 주택시장에 악영향을 끼칠 우려가 있어 주택은행에 유보해줄 것을 요청했다" 고 밝혔다.

◇ 외자유치 혼선 = 이날 우왕좌왕하기는 산업자원부도 마찬가지. 오영교 (吳盈敎) 산자부차관은 14일 오전 기자간담회를 가진 자리에서 "외국인 투자유치 실적이 부진하다는 지적이 있는데 하반기 중 기업들이 많이 추진하고 있어 올해 목표 1백50억달러 달성이 가능할 것" 이라며 각 기업의 구체적인 외자유치 추진현황을 참고자료로 내놓았다.

이것이 문제가 됐다. 한창 협상 중이거나 아예 협상에 진척이 없는 내용까지 '실명' 으로 죄다 포함됐기 때문이다. 기업들이 발칵 뒤집혔다. 언론사로 정정을 요구하는 전화와 자료가 쇄도했다.

그러자 박봉규 (朴鳳圭) 무역투자심의관은 이날 오후 뒤늦게 "내부 참고자료로만 활용하고 개별기업의 구체적인 내용은 보도되지 않도록 해달라" 고 부탁했다.

朴비서관은 "서비스 차원에서 참고자료로 줬는데 기사화되면 정부가 기업들에 외자유치를 압박한다는 인상을 줄 우려가 있다" 며 "자료제공은 실수였다" 고 해명했다.

이에 대해 재계 관계자는 "정부가 외자유치 실적으로 공 (功) 세우기에 바빠 기업사정을 감안하지 않고 있다" 며 "기업의 외자유치를 갖고 정부가 생색을 내는 꼴" 이라고 꼬집었다.

◇ 공모주 수요예측 제도 변경 = 금융감독원은 공모주 청약을 받을 때 실시하는 수요예측 절차에 일반 투자자들을 참여시키는 제도를 2개월도 못돼 중도하차시켰다.

감독당국의 준비 부족과 증권사들의 '자기몫 챙기기' 로 각종 부작용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개인들이 바뀐 제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동안 증권사들만 재미를 봤다.

현대중공업 공모주 배정의 주간사를 맡은 한 증권사는 '끼워팔기' 로 자사 금융상품을 5천억원 가량 팔았다.

다른 증권사들도 자기 회사의 공모주 경쟁률을 높이는 데에 바빴다. 투자자들이 청약증거금으로 낸 돈을 공모주 배정이 끝날 때까지 무이자로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금융감독원이 지난 14일에야 뒤늦게 제도를 일부 개정했으나 투자자들의 불편은 여전하다는 것이 증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기관투자가들이 대부분인 미국 등에서 시행하는 제도를 개인 투자자들의 비중이 높은 국내에 그대로 갖고 온 것이 문제였다" 고 털어놨다.

고현곤.이계영.주정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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