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우리의 화가 박수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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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서양미술에서 사실주의가 등장한 것은 19세기 중반이다.

근대 시민사회의 성립으로 주제.방법에서 의미를 상실한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대신 사실주의가 태어났다.

사실주의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고 꾸밈없이 묘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로는 프랑스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오노레 도미에.장 프랑수아 밀레 등이 있다.

같은 사실주의 화가지만 쿠르베와 도미에가 부패한 정치와 사회부조리를 풍자하는 도시적 화풍 (畵風) 이었던 데 비해 밀레는 자연과 함께 사는 농민들의 소박한 삶을 찬양하는 농촌화가였다.

밀레가 살았던 파리 교외 퐁텐블로 숲속의 작은 마을 바르비종에는 비슷한 생각을 가진 화가들이 모여 살았다.

미술사에선 이들을 가리켜 바르비종파 (派) 라 부른다.

당시 파리 화단 (畵壇) 은 일하는 농민을 주로 그리는 밀레를 사회주의자로 몰았다.

그러나 밀레의 그림에는 사실주의적 요소와 함께 자연에 대한 감동과 종교적 경건함이 깃들어 있다.

밀레의 대표작인 '이삭줍기' 와 '만종 (晩鐘)' 엔 이 같은 경향이 잘 나타나 있다.

이들 두 작품은 세계 각국에 널리 알려져 밀레를 미술사상 가장 사랑받는 화가의 한 사람으로 자리잡도록 했다.

밀레는 한국의 박수근을 탄생시켰다.

보통학교 시절 책에서 '만종' 을 본 박수근은 커서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되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했다.

훗날 박수근이 그린 그림들을 보면 그가 어린 시절의 소원을 이뤘음을 알 수 있다.

화강암 표면처럼 거친 마티에르, 회색조의 단조로운 화면 위에 나목 (裸木).초가집.농촌풍경.아이들.노인.행상.일하는 아낙네. 박수근의 그림은 한국 근대사의 시련을 꿋꿋이 견뎌온 서민들의 모습이다.

박수근은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갖고 있다" 고 미술관을 피력한 바 있다.

또 그 자신 착하고 진실한 인간성의 소유자였다.

평생을 가난과 병마와 싸우며 고통스럽게 살았던 박수근이 오늘날 한국인들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화가, 그림값이 가장 비싼 화가로 자리잡은 것은 서민들이 살아가는 평범한 모습들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16일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개막된 '우리의 화가 박수근' 전 (展) 은 지금까지 열린 박수근 유작전 (遺作展) 가운데 가장 큰 규모다.

'국민화가' 박수근의 불꽃 같은 예술혼을 음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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