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터쇼, 신차 발표회, 해외 준공식 모두 그가 치렀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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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현지시간) 체코 최대의 공업도시 오스트라바 인근 소노비체. 인구 3만여 명의 한적한 이 시골마을 거리는 온통 파란색 ‘HYUNDAI’ 현수막으로 뒤덮이다시피 했다. 이날 열린 현대자동차의 체코공장 준공식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다. 현대차의 유럽시장 공략 거점 역할을 할 이 공장은 연산 20만 대 규모의 설비를 갖췄다. 현대차는 2007년 이 공장 착공 이후 10억 유로(약 1조7000억원)를 투입했다. 앞으로 1억2000만 유로를 추가 투자해 2012년까지 생산 능력을 연간 30만 대로 확충할 계획이다.

이날 준공식 행사에서는 정몽구(71) 현대·기아차그룹 회장 대신 정의선(39) 현대차 부회장이 참석한 대목이 눈길을 끌었다. 지금까지 해외 공장 준공식만큼은 정 회장이 직접 챙겨오던 관례가 깨진 것이다. 현대차의 한 임원은 “정 회장이 중요한 행사를 정 부회장에게 맡기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 지난달 21일 현대차 부회장으로 승진한 이후 정 부회장은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15일 개막한 독일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 참석한 뒤 17일 귀국하자마자 YF쏘나타 발표회를 주재하는 등 정 회장을 대신해 강행군을 펼치고 있다.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선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우면서 4시간 내내 부스를 방문하기도 했다. 이 같은 그의 행보는 그룹의 2인자임을 확인시켜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일찌감치 경영수업을 받아왔다.

글로벌 경제위기 속에서도 현대차가 좋은 실적을 올리고 있다는 자신감 때문일까. 정 부회장은 준공식 행사 내내 여유 있으면서도 결연한 표정이었다. 그는 부회장 취임 이후 어떤 경영전략을 구상하고 있는지 묻자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하겠다”고 짧게 대답했다. 정 회장의 트레이드마크인 품질경영과 현장경영을 이어가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한국 2위 기업인 현대·기아차의 총수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는 정 부회장의 그간 경영 성적표와 향후 과제를 4개 키워드로 알아 봤다.
 
정 부회장이 2005년 2월 사장을 맡을 당시 기아차는 원화 가치 상승 등의 요인으로 적자 늪에 빠진 상태였다. 그는 돌파구를 ‘디자인 경영’에서 찾았다. 그 첫걸음으로 이듬해 7월 독일 출신의 피터 슈라이어를 기아차 디자인총괄담당(CDO) 부사장으로 전격 영입했다. 아우디·폴크스바겐의 수석 디자이너를 지낸 슈라이어는 유럽에서 손꼽히는 자동차 디자이너다. 실무진에선 연봉 10억원이 넘는 거액의 스카우트 비용을 이유로 반대했지만 정 부회장은 “디자인 경영을 하려면 슈라이어가 필요하다”며 밀어붙였다.

슈라이어 영입 직후 그해 9월 열린 프랑스 파리 모터쇼에서 정 부회장은 대외적으로 ‘디자인 경영’을 천명했다. 그는 “기아차 라인업에 감각적 디자인 요소를 가미함으로써 세계 무대에서 기아차의 경쟁력을 향상시키겠다”고 밝혔다. 사실 기아차의 디자인 경영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현대차와 플랫폼(차의 기본 골격)을 공유하는 기아차로선 디자인 차별화에 나서지 않고선 ‘아우 회사’ 내지 ‘2등 브랜드’ 이미지를 벗어나기 힘들었던 것. 정 부회장이 평소 “기아차의 품질이 좋아졌는데도 브랜드 파워가 약해 시장에서 제값을 받지 못한다”고 안타까워했던 것도 이런 현실을 보여준다.

그는 이후 ‘심플하면서도 아름다운 직선 라인을 만들어내겠다’는 방향을 제시해 기아차 정체성 찾기에 나섰다. 2007년 말엔 사장 직속으로 ‘브랜드 전략실’도 만들었다. 이후 명함부터 해외 대리점 인테리어까지 기아차의 브랜드 컬러인 ‘빨간색’을 적용했다. 정 부회장은 주요 행사 때마다 ‘빨간 넥타이’를 매고 나와 기아 브랜드를 홍보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유럽(프랑크푸르트)·미국(캘리포니아)·일본(지바) 등을 잇는 글로벌 디자인 네트워크도 구축했다.

지난해 8월 기아차는 호랑이 코와 입을 모티브로 한 라디에이터 그릴 디자인을 ‘패밀리 룩’으로 도입했다. 이는 로체이노베이션·포르테·쏘울 등에 적용되면서 기아차만의 독특한 디자인 정체성을 담아낸 것으로 평가 받는다. 덕분에 실적도 껑충 뛰었다. 올 상반기 기아차는 50만9000여 대를 판매해 8조1788억원 매출에 영업이익 4192억원, 당기순이익 4445억원의 실적을 기록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영업이익은 곱절 가까이, 순이익은 6배 이상 뛰었다.
 
현대차 체코공장 준공을 계기로 현대·기아차는 터키(97년)·인도(98년)·중국(2002년)·미국(2005년)·슬로바키아(2006년) 등에 글로벌 생산 기지를 갖추게 됐다. 올해 말 양산에 들어갈 미국 조지아공장(기아차), 2011년 가동 예정으로 건설 중인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공장(현대차) 등을 더하면 글로벌 생산기지 구축 작업은 마무리 수순에 들어간다. 2011년께 현대·기아차의 해외 생산 능력은 303만 대에 이를 것으로 전망한다. 국내(311만 대)까지 합치면 연간 생산 능력이 600만 대를 넘어서게 된다. 이와 관련, 정 부회장은 24일 체코공장 준공식에서 “2012년이면 글로벌 생산 목표량이 650만 대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일본 도요타(885만 대·이하 2008년 생산대수 기준), 미국 GM(794만 대), 프랑스 르노닛산(681만 대)에 이어 ‘글로벌 빅4’ 진입을 넘보게 되는 셈이다.

글로벌 시장 상황에 따른 유연한 생산 방식 도입도 주목 받는다. 필요에 따라 해외에선 현대차 공장에서 기아차를, 기아차 공장에서 현대차를 생산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당장 11월부터 체코공장에선 기아차의 소형 다목적 차량(MPV) ‘벤가’를 생산할 예정이다. 체코공장은 이런 교차 생산을 실험하는 첫 번째 생산 기지가 된다. 정 부회장은 “현대차와 기아차의 교차 생산을 확대해 나갈 계획”이라며 “기아차 슬로바키아공장에서 (현대차) 투싼ix를, 미국의 기아차 조지아공장에서 (현대차) 싼타페를 생산하는 방안 등이 확정됐다”고 말했다.

현대차 앨라배마공장에서는 기아차 쏘렌토R을 생산하는 방안도 추진되고 있다. 현대차 관계자는 “시장 트렌드에 맞춰 생산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는 시스템”이라며 “그만큼 안정적인 품질 역량을 확보했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기아차 사장 시절 경영 능력을 평가받은 정 부회장으로선 앞으로 현대차와 기아차의 글로벌 생산체제의 시너지를 높여 나가는 게 최대 과제가 될 전망이다.
 
정몽구 회장이 가장 강조하는 것은 품질이다. 현대·기아차 품질본부장인 신종운 사장이 신형 쏘나타 발표회가 열린 17일 부회장으로 파격 승진한 게 단적인 예다. 올 초 정기인사에서 사장이 된 지 9개월 만에 승진한 셈이다. 신차 발표회에 앞서 시범 생산한 쏘나타 품질이 내부 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은 게 특진 사유다.

정 부회장 역시 정 회장의 뜻에 따라 품질 개선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최근 독일의 일부 기아차 딜러들은 주행거리와 상관 없이 7년간 보증 수리를 해주는 ‘7년 개런티’라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고 있다. 현대차가 미국에서 재미를 봤던 ‘10년, 10만 마일 보증’을 응용한 것이다. 정 부회장이 기아차 사장 시절 품질 개선을 이뤄낸 게 뒷받침됐기에 가능한 마케팅 기법이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인근 뤼셀스하임에서 현대차 딜러를 하고 있는 한스 페터 괴레스 사장은 “벤츠·BMW를 타던 고객이 현대차를 사기 위해 자주 방문하고 있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요즘 자동차 품질을 따질 때 강조되는 것 중 하나가 친환경성이다. 이와 관련, 정 부회장은 15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모터쇼 개막식에서 “현대차의 목표는 자동차 산업의 친환경 리더가 되는 것”이라며 “유럽 판매 차종의 평균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2015년까지 ㎞당 115g(2007년 161g)으로 줄일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아직은 숙제가 많다. 특히 친환경 기술에서 해외 경쟁업체에 밀리고 있다. 올 7월 출시한 현대차 아반떼 하이브리드와 기아차 포르테 하이브리드는 이런 고민을 그대로 담고 있다. 현대·기아차는 두 하이브리드 모델에 가솔린 대신 액화석유가스(LPG)를 연료로 쓰는 LPi 엔진을 채택했다. 업계에선 “현대차가 일본 도요타자동차의 800개가 넘는 하이브리드 특허를 피하기 위해 (가솔린 대신) LPi엔진을 택한 것”이라고 본다. 그만큼 선발 업체의 기술 장벽을 정면으로 뚫고 가기 어렵다는 얘기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공학과 교수는 “친환경 자동차 등 지금 세계 자동차 시장은 약육강식의 시대”라며 “세계 자동차 시장의 환경 기준이 강화되는 추세지만 현대차는 아직 이 분야 기술 축적이 충분치 못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유럽 시장에서 현대차의 대표 모델은 i30다. 이 차는 풀 옵션 장착 모델의 경우 2만 유로대에 팔린다. 원화로 3400만~3500만원쯤 하는 셈이다. 한국에서 이 차는 2000만원대에 팔린다. 환율(Exchange rate) 효과 덕분에 차를 파는 현지 딜러 입장에선 가격 협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셈이다. 현대차의 공격적인 마케팅도 돋보인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내리면 ‘현대’ 광고판이 가장 크게 눈에 띈다. TV나 잡지에서도 현대 i시리즈 광고를 쉽게 만날 수 있다.

이에 힘입어 현대차의 유럽 판매 실적은 호조세다. 유럽자동차공업협회에 따르면 현대차의 올 1~8월 유럽 판매 실적은 22만6241대로 지난해 동기 대비 19.8% 증가했다. 유럽 시장 진출 업체 중 가장 높은 성장률이다. 현대차는 올해 유럽 시장 판매 목표를 33만6000대로 잡고 있다. 지난해보다 17% 늘어난 것으로 글로벌 경제위기 이전 수준의 판매 회복을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시장 환경이 현대차에 우호적이지만은 않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최대식 하이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현대차의 공격적 프로모션과 이에 따른 시장점유율 상승은 원화 가치 하락에 따른 막대한 환차익에 힘입은 측면이 크다”며 “고비용 구조가 정착된 현대차로선 원화 가치가 급상승하면 딜레마에 빠질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이에 대해 정 부회장은 “소형차의 고급화에 신경 쓰는 한편, 유럽인 취향에 맞는 모델을 싸게 내놓는 방안을 연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프랑크푸르트(독일)·소노비체(체코)=이상재 기자 sangja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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