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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도 '과거사' 놓고 치고받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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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일제 식민지지배, 박정희 전대통령 평가 등 과거사 문제가 정치 쟁점으로 등장한 가운데 '대중독재'를 놓고 두 학자가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있다. '대중독재'개념을 한국 현대사에 끌어들인 임지현 교수(한양대.서양사)와 진보적 사회학자로 분류되는 조희연 교수(성공회대.사회학)는 '역사비평'여름호에 이어 가을호에서도 비판과 반(反)비판을 주고 받았다.

임 교수는 지난해 '강압과 동의:대중독재'라는 제목으로 국제심포지움을 열고 그 성과를 단행본으로 묶어냄으로써 '대중독재'를 본격적으로 부각했다. 이에 대해 조희연 교수는 '역사비평' 지난 여름호에 실린 '지배.전통.강압.동의-박정희 시대를 생각한다'라는 글에서 "'대중독재' 개념은 자칫하면 우익화할 정치적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이어 임 교수도 같은 잡지 가을호에 '대중독재와 포스트 파시즘'을 다시 기고, "조 교수의 비판은 좌파 지식인들이 전형적으로 사용하는 '혐의의 정치학'"이라고 혹평함으로써 논쟁은 더욱 달구어졌다.

대중독재론은 일제의 식민지지배나 군사독재 등 파시즘적 지배를 단순히 '소수의 사악한 가해자'의 억압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나치 등 유럽의 파시즘을 연구해보니, 파시즘 지배가 실제로는 대중의 '동의'를 통해 가능했다는 인식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일제 지배를 포함한 파시즘에도 대중의 암묵적 동의가 전제되어 있으므로 '억압'과 '저항'이라는 이분법만으로 파악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임 교수의 주장은 지나친 민족주의.국가주의는 결국 파시즘으로 흐를 것이므로 이를 뛰어넘어 탈(脫)민족.탈국가로 나아가야 한다는 역사학계의 한편의 흐름을 반영한 것이어서 더욱 주목받았다. 민족의 이름으로 과거의 친일.반일을 논의하는 자체가 무의미할 수 있고, 어디까지 친일로 볼 것이냐를 명료하게 구분할 수 없다는 정치적 함의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희연 교수가 '역사비평' 여름호에서 임 교수를 비판한 것도 이 같은 정치적 함의와 관련해서다. 그는 대중독재론이 '기존의 논의가 경직화되지 않았는지를 성찰하는 계기를 제공'했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거꾸로 임교수도 동일한 일면성에 빠지고 있다고 비판한다. 즉, 식민지나 파시즘에 대한 그동안의 연구는 대중과의 관련성을 배제했다기보다는 '지배의 억압성'을 강조했을 뿐이며, 오히려 임 교수의 주장이야말로 '대중의 동의'를 상정함으로써 모두가 공범자라는 식으로 파시즘 자체의 헤게모니를 당연시하는 오류로 진전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임 교수의 재반박도 만만치 않다. 그는 '소수의 사악한 가해자'와 '다수의 선량한 피해자'라는 이분법은 일종의 '악마론적 코드'이며, 그 바탕에는 '민중은 저항의 주체이자 순결한 희생자'라는 '숭고한 민중주의'가 깔려 있다고 비판했다. 임 교수는 대신 유동적이고 다층적인 민중의 생활세계를 이해함으로써 새로운 '저항의 지점'을 찾고자 한다. 그는 "파시즘의 일상세계와 동의의 구조 속에 다양한 저항의 지점이 파편적으로 존재한다"며 "동의 속에 잠재된 저항을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번 논쟁은 두 학자가 우리 지식사회의 일정한 흐름을 각기 대변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크다.

김창호 학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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