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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세에 만난 독서회, 내 인생이 달라졌어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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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호 20면

서대문도서관 39글사랑 독서회39 회원 8명이 24일 서울 서소문 중앙일보 본사 앞 잔디밭에 모였다. 왼쪽부터 김인희, 금화성, 조은순(시인·창립 멤버), 송방옥, 한난희(창립 멤버), 유지희(시인·독서회 총무), 김금년(창립 멤버), 김옥경씨. 신동연 기자

“독서회 회원들이 가장 큰 힘이 됩니다. 예를 들어 인권영화제를 하면 회원들이 전부 내 일처럼 생각하고 찾아와 격려하고 도와줍니다. 여성들이 40대 이후에 어떤 의미를 찾고 어떤 방향으로 가느냐가 중요한데 제게는 책을 통한 교류가 힘의 원천입니다. 서로를 지지하고 동조해 주는 가운데 긍정적인 힘을 많이 얻게 됩니다.”

도서관이 좋다 1 서대문도서관 커뮤니티 '글사랑'

서울 서대문도서관이 운영 중인 ‘글사랑 독서회’ 회원 김영자(51)씨의 말이다. 김씨는 현직 한국여성의 전화 가정폭력상담소장이다. 2000년 상담 활동을 시작해 올해 소장이 됐다. 소장을 맡기 전까진 인권센터장을 했다. 김씨가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상담 일을 시작한 계기는 독서회 가입이었다.

“인천에서 살다가 1999년 지금 사는 서대문구로 이사 왔어요. 오자마자 도서관부터 찾아갔죠. 중·고등학교 국어 교사를 하다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그만뒀지만 문학엔 관심이 많았거든요. 그때 독서회 창립 멤버인 김금년씨를 만났는데 그가 청각장애인에게 책을 읽어주는 자원봉사활동을 하고 있다는 얘길 듣고 감동을 받았어요.”

김씨는 그즈음 한국여성의 전화에서 상담원을 모집하는 걸 알았다. 2000년 4월에 상담원 교육을 받고 일을 시작했다. 그는 당시 여성 여행가 한비야씨가 쓴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이라는 책을 읽었다 . “나는 집을 위해서만 살았는데 사회를 바라보고 먼 데를 가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안 거죠.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다가 사회에 눈을 뜨게 됐던 겁니다.”

김씨는 여성부 성폭력예방교육 및 양성평등 강사, 아동성폭력예방 강사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강의도 해 왔다. 서강대에서 1년짜리 전문상담교사 과정을 수료했고 2006년엔 국민대에서 상담심리학 석사 학위를 땄다. 김씨는 “40대의 나이에 강의를 하고 공부를 시작하게 한 모태가 서대문도서관 독서모임이었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독서회는 공공도서관의 대표적인 커뮤니티다. 1997년 창립돼 지금까지 활동을 하고 있는 서대문도서관 글사랑 독서회도 그중 하나다. 창립 회원은 5명이었다. 그 가운데 지금까지 활동 중인 사람은 김금년·한난희·조은순씨다. 2000년 5명이 추가로 들어오면서 자리를 잡았다. 현재 회원은 17명이다. 대부분 40~50대이고 30대가 1명 있다. 그동안 독서회 담당 사서만 5명이 거쳐갔다.

“처음 독서회에 나가기 전 독후감을 써오라고 해서 갖고 갔더니 아무도 안 써온 거야. 그만둘까 했는데 김금년씨가 독후감을 잘 썼다고 칭찬을 하데. 그 덕분에 남아 있다가 좋은 사람들을 만난 거지.” 창립회원 한씨의 말이다. 글사랑 독서회가 좋은 점은 뭘까.

17명 회원 중 등단한 시인이 2명
한씨를 포함한 회원 모두는 독서회의 장점을 다양한 책 읽기와 우울증 타파, 회원들이 칭찬으로 서로 용기를 북돋워 준다고 평가한다. 한씨는 “혼자서 책을 읽을 때는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만 읽는데 독서회에선 1년 도서 목록을 미리 짜기 때문에 시,소설,영화,평론 등 다양한 분야를 체계적으로 접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사회과학 분야와 과학 분야 도서를 읽으면서 사고가 깊어진 느낌”이라며 “독서회에 나가서 어울리다 보면 즐거워지기 때문에 주부 우울증도 없다”고 말했다. 독서 모임에서 각자 자신의 어려움을 털어놓으면서 정서적 치유가 된다는 설명이었다. 같은 책을 읽어도 각자 생각이 달라 10권을 읽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걸 장점으로 꼽기도 했다.

17명의 회원 가운데는 시인이 2명이다. 모임 연락을 맡고 있는 총무 유지희(51)씨와 전 총무 조은순씨다. 유씨는 독서회에 들어오기 전인 98년 맥문학 신인상을 탄 뒤 한국문인협회 시인으로 등단했다. 2004년에 시집 『삶은 너무도 깊은 사랑이어서』를 펴냈고 올해 11월 두 번째 시집을 낸다. 한 달에 한 번(셋째 금요일 오전 10시~낮 12시) 독후감 발표가 끝난 후 유씨가 시를 써와 윤독하는 게 관례처럼 돼 있다고 한다. 유씨는 고 피천득 선생과의 인연을 기억했다. “시집이 나와서 우편으로 보냈는데 한번 보자고 연락이 왔어요. 자택으로 찾아갔더니 나올 때 손수 사인한 책 2권을 주시더라고요. 잔잔한 감동으로 남는 시를 쓰라는 말씀을 평생 간직하고 살려고요.”

유씨와 달리 조씨는 독서회 활동을 하다가 시인이 됐다. 2005년 봄에 등단, 『내가 닮고 싶은 민들레』 등 시집 2권을 냈다. 등단 직후 한국사이버대학 문예창작과에 진학해 올해 졸업했다. 독서회에서 매달 선정한 책을 한 권씩 사서 꽂았더니 10여 년 만에 작은 책꽂이가 가득 찼다고 한다. 일이 생겨 모임에 결석할 때는 인편으로 독후감을 보낼 정도로 열성파였다는 게 다른 회원들의 말이다. 조씨는 “도서관에 가서 책을 고를 때 행복하다. 다른 사람들이 집이나 땅 등 부를 좇아 간다지만 내 정체성을 찾아가는 게 더 재미있다. 독서 모임이 흔들리지 않는 에너지를 준다. 독서 모임을 통해서 문학을 접하고 알게 됐다. 슬픔도 행복으로 감쌀 줄 아는 지혜를 여기서 얻는다”고 말했다.

시각장애인 영어교사 만든 건 위인전의 힘
이경희(52) 회원은 시각장애인 최초로 일반임용고시(영어과)에 합격한 최유림(26)씨의 어머니다. 선천성 1급 시각장애인인 최씨는 2007년 1월 임용고시에 합격해 천안두정중학교 영어교사로 재직 중이다. 이씨가 아들을 키운 힘도 독서였다. “결혼 후 남편이 사업에 실패했고 외아들은 시각장애가 있었어요. 탈출구가 없었어요. 생계 수단으로 수퍼마켓을 했는데 여가 선용으로 책에 매달렸어요. 상상의 세계에 빠지기도 했고 정보도 얻었어요. 아들 손을 잡고 도서관에 자주 갔죠. 헬렌 켈러 등 위인전을 읽으면 우리가 겪는 삶의 역경이 별것 아닐 수 있음을 깨닫잖아요. 그런 얘기들을 많이 해 줬고 아들도 깨닫는 게 많았던 것 같아요. 천안에서 혼자 사는데 매주 서울 집에 와요. 혼자서도 어디든 잘 다녀서 걱정 안 해요.”

독서회 총무 유씨는 “회원들이 책을 많이 읽어선지 자제 분들이 다 공부도 잘하고 바르게 자란 것도 자랑거리”라고 소개했다. 분위기가 좋아 멀리 이사를 가서도 모임에 참석하는 이들도 있다. 지난해 공무원인 남편을 따라 부산으로 이사 간 이모씨는 지금까지 세 번이나 KTX를 타고 올라와 모임에 참석했다고 한다. 글사랑 독서회에는 회장이 없다. 총무만 있다. 권위를 없애자는 취지에서 처음부터 그렇게 했다고 한다. 이 독서회는 2~3년에 한 번씩 독후감을 쓴 글들을 모아 문집 형태로 출간했다. 올해 4월 글사랑 4호가 나왔다.

매년 4월과 10월 독서 모임은 야외에서 진행된다. 올봄엔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을 읽고 직접 남한산성을 방문했다고 한다. 내년 2월엔 소설 『설국』의 무대가 된 일본 홋카이도 여행을 계획 중이다. 올해 11월에 읽을 책으로 설국이 정해졌다. 올 2월에는 『조선의 시지프스』라는 책의 저자인 이은식씨를 초청해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유씨는 “도서관마다 청소년·어린이·성인(주로 주부) 독서회가 있지만 구성원들이 바뀌지 않는 건 주부독서회뿐이고 그마저도 오래 못 가는 경우가 많다”며 “책으로 맺어진 13년 인연을 소중히 가꿔가겠다”고 다짐했다.창립 멤버 김금년씨는 “우리는 조 시인의 시세계가 발전해가는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지켜봤다. 독서회 활동의 열매가 조 시인”이라고 말했다. 서로 용기를 북돋워주고 칭찬해 주는 문화, 그게 장수 비결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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