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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우석 칼럼] 추석에 읽는 시골 얘기, 고향 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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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지난해 받았던 귀한 선물이 고(故) 민병산 선생의 글씨 한 점이다. ‘인사동 디오게네스’로 통했던 그는 1980년대 무렵 지나가는 이들에게 당신의 붓글씨를 나눠준 일화로 유명한데, 내 것은 조카 민영기씨의 판각이다. “振衣千仞岡 濯足萬里流” 탈속(脫俗)한 서체만큼 중국 명나라 육방호의 시 자체가 사람을 취하게 한다. “천길 높이의 산에 올라 옷자락 날리고, 만길 강물에 두 발을 담그네.” 묘한 건 작품을 얻은 뒤 생긴 변화다. 주말이면 친구들과 서해안 숭어 천렵, 강화도 마니산 가재 잡이로 쏴 다녔다. 자연에 사는 삶을 권유하는 판각의 기운 탓이 아닐까?

고기떼를 몬답시고 팬티바람으로 친구들과 첨벙댈 때의 아우성, 비늘을 번뜩이던 숭어 떼의 장관을 생각하면 지금도 몸이 스멀댄다. 왜 우리는 자연에 열광할까? 왜 주말이면 TV에 ‘1박2일’ ‘패밀리가 떴다’ 등 자연·시골체험 프로에 눈길이 몰릴까? 얼마 전 친구들과 함께 찾았던 강원도 홍천 ‘힐리언스 선마을’에서 정신과의 이사형 박사가 모닥불에 고구마를 구워먹으며 그 비밀을 일러줬다. “감자·고구마 캐기, 천렵이나 사냥, 밤하늘 별보기야말로 구석기 이후 인류의 근원적 체험이지요. 그래서 뿌리 체험(roots experience)이라고도 하는데, 그때 비로소 우리는 꽉 찬 행복을 느낍니다.”

민족의 명절 한가위가 다음 주다. 친척 만나고 성묘까지 마치셨다면, 아이들과 잠시 나서는 자연체험은 어떠실지. 마침 옛 시골생활의 노하우를 담은 귀한 책이 있다. 평생 고향을 지켜온 시인 김용택이 펴낸 『섬진강 이야기 1,2』가 그것이다. 이 10년 스테디셀러에서 챙겨보실 것은 생생한 자연체험의 목록이다. 재미의 으뜸인 천렵만도 수십 가지다. 봄철 물벌레를 미끼로 한 피라미 낚시, 한겨울 통발을 놓아 건지는 쏘가리·메기, 작살로 건져 올리는 자라 잡이….

묵직한 떡메로 바위를 내리치는 ‘엽기 천렵’도 있다. 한겨울 개울 속 바위를 잘 골라 눈 덮인 산천이 울리도록 텅텅 때려대면 그 서슬에 기절한 물고기가 흰 배를 드러내며 둥둥 떠오른다. 뿐인가? 여름·가을의 가재·논게 잡이, 겨울 초가집 처마를 뒤지는 참새 잡이라니…. 참새 죽의 맛은 일품인데, 참새가 소머리에 앉아 “네 고기 열 점과 내 고기 한 점을 안 바꾼다”고 한다던가? 고향과, 그곳에 두고 온 기억이 떠오르실 것이다.

상경 이후 허겁지겁 살아온 우리들인지라 섬진강변의 전북 임실군 덕치면 진메마을의 사계절과 그곳의 풀·꽃 그리고 순박했던 사람들 이야기는 살갑게 읽힌다. 산업화 이후 모든 게 팝콘 튀겨지듯 정신없이 돌아갔는데, 이 책에는 ‘그 이전의 소식’이 마치 타임캡슐인 양 담겼다. 아쉽게도 이 책은 조금 낡았다. 차제에『그리운 것은 산 뒤에 있다』등 그가 쓴 다른 책과 통합해 수정본을 펴낼 법 하다. 김용택 자신도 고향이야기를 쓸 무렵 “일생일대 작업”이라고 호언하지 않았던가? 고향을 떠올리니 마음은 벌써 추석이다.

조우석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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