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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눈] 재벌개혁 제2라운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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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대통령의 사과 뒤에는 무엇이 올까.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에 나선 이후 "그럼 그렇지" 하며 기세를 올리거나 "이러저러 해야 한다" 는 주문에 더 힘을 싣는 곳이 많다.

기세든 주문이든 '가벼운 흥분' 정도라면 모르겠으나, 金대통령의 사과가 정말로 국정의 방향을 뒤집는 변곡점 (變曲點) 이 되리라고 믿고 들뜬다면 걱정이다.

金대통령의 사과는 궤도 수정을 위해서가 아니라 궤도 이탈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봐야 하며, 또 대통령의 사과 한번으로 이 사회가 또다시 진폭 (振幅) 이 큰 시계추 운동에 휘말릴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金대통령의 사과 이후 거론되는 후속조치들을 보면 한 기세 올리거나 큰 기대를 걸기보다는 오히려 걱정이 앞선다.

사과 이후 국정의 최우선 순위는 경제에 두어질 것이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우리가 정국 안정을 바라는 것은 정치.사회의 갈등이 경제의 발목을 잡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 우선' 이라는 金대통령의 국정 운영이 어디 어제 오늘 일인가.

그 '경제 우선' 이 옷 로비에 휘감기고 폭탄주의 취기 (醉氣)에 흔들리자 그래선 안되겠다고 대통령의 사과가 나온 것이라고 봐야 옳지 않겠는가.

이처럼 너무나 당연한 국정 목표가 다시 앞세워지고 강조되는 것을 놓고 걱정이라니 웬 소리인가 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왕 金대통령이 앞으로는 넓은 귀를 열어놓고 많이 듣겠다고 했으니 요즘 시중의 '정치 민심' 만이 아니라 '경제 민심' 도 한번 전해보자. 金대통령의 사과가 나오자 한 재계인사는 사석에서 "호재라기보단 악재라고 본다" 고 말했다.

경제개혁에 전념하기 위해 정치적 사과가 나온 것이라면 몰라도, 정치적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시 경제개혁을 메뉴로 삼는 것은 곤란하다는 얘기다.

혹시라도 재벌 두들기기로 민심을 다독거리려 하지 않겠느냐는 걱정이다.

이같은 걱정을 아직도 여전한 '재벌의 반 (反) 개혁적 사고' 라고 몰아붙인다면 이미 세상이 변해도 많이 변했다는 것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최근의 한 토론회에서 또다른 재계인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정권의 말을 안들을 만큼 재무구조가 튼튼한 기업이 어디 있나. 정권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도 기업 할 수 있도록 요즘 각 기업들은 재무구조 개선에 온 힘을 쏟고 있다. "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이보다 더 강한 유인책이 있을까. 채권은행단과의 재무구조 개선약정 때문이 아니라 정치논리로부터의 보호벽을 쌓기 위해 빚부터 줄이겠다니 정경유착의 고리는 기업들이 먼저 끊으려 한다는 소리가 아닌가.

재벌의 구조조정 의지를 이보다 더 간략하게 요약한 말도 있다.

정주영 (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외환위기 이후 사장단이 머리를 맞대고 짜낸 복잡한 구조조정방안을 보더니 짤막하게 한마디 했다고 한다.

"그래, 미국식으로 가자는 거지?" 정부가 두들기지 않아도 기업들은 살아남기 위해 이처럼 적확한 목표를 정한다.

반면 최근 경제부처의 한 장관과 간담회를 가졌던 어느 재계인사는 며칠 뒤 사석에서 다음과 같이 혀를 찼다.

그 자신 정부의 고위직에서 일했던 인사였다.

"지금은 과거와 달라 정부 눈치 일절 볼 것 없이 마음놓고 기업활동을 해도 된다니, 삼척동자도 다 아는 거짓말을…. " 지금도 이러한데 대통령 사과 이후 다시 재벌개혁이 앞세워지니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일부에선 빅딜이 재벌개혁의 완성판인줄 안다.

그러나 빅딜이 밀어붙여지는 뒤편에선 다른 소리가 들린다.

"빅딜은 구조조정이 아닌 줄 알고 있다. 그러나 대통령이 한번 꺼낸 말을 거두기가 어려워 그냥 가는 것 같다. " 현직 고위관리로부터 들은 진솔한 말이다.

빅딜을 빼면 재벌개혁은 큰 틀이 이미 제대로 잡혀 있다.

대통령이 사과했다고 크게 고치거나 더할 것은 별로 없다.

정작 정부가 더욱 힘쓸 것은 외환위기로 가장 큰 피해를 본 중산층.서민을 위한 정책이다.

빈부격차가 벌써 커진 마당에 오히려 늦었다.

재벌개혁이 곧 중산층 대책이지도 않거니와 모처럼 나온 대통령의 사과가 우리 경제에 악재 아닌 호재가 되게 하려면 재벌개혁보다 중산층.서민대책을 더 앞세울 때다.

김수길 경제담당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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