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배수의 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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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15일 아침 연평도 인근 서해상에서 남북한 해군 함정간에 교전이 벌어진 직후 백령도의 예비군인 한 주민은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우리 뒤에는 바다밖에 없습니다. 삶의 터전을 목숨바쳐 지킬 사람은 우리밖에 없지요. " 서해 최북단의 땅으로 남한 본토보다 북한 내륙에 가까운 섬 주민으로서의 결연한 의지가 엿보인다.

바다를 등지고 끝까지 싸우겠다는 이 주민의 말은 중국 고사에 나오는 '배수 (背水) 의 진 (陣)' 을 떠올리게 한다.

한 (漢) 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기 2년 전 한나라의 명장 한신 (韓信) 이 조 (趙) 나라를 공격했을 때의 일이다.

한신은 전방에 1만명의 군사를 매복시켜 놓고, 본대 (本隊) 는 넓고 깊은 강을 뒤에 두고 진을 치게 한 다음 조나라 군사를 유인했다.

물밀듯이 밀려오는 조나라 군사를 맞아 강을 등에 진 한나라 군사들은 죽기를 한하고 싸웠다.

기세에 눌린 조나라 군사들이 뒤로 밀리는 사이 매복한 군사들은 조나라 진영을 함락했고, 한신은 손쉬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한신의 이같은 작전은 종래의 병법에는 어긋나는 것이었다.

종래의 병서 (兵書) 들은 '산을 등 뒤에 놓고, 물은 앞에다 두고 싸우라' 고 가르친 것이다.

승전한 뒤 부하들로부터 그에 대한 질문을 받은 한신은 이렇게 대답했다.

"어떤 병법이든 모든 경우에 똑같이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사지 (死地)에 디밀어 놓으면 비로소 살 길을 얻는 수가 있다' 고 가르치는 병서도 있지 않은가. "

그래서 현대전에 있어서의 '배수진 작전' 도 물을 등 뒤에 놓고 싸우는 개념이 아니라 '죽기를 무릅쓰고 싸우는' 개념이다.

목숨을 걸고 싸우면 어떤 막강한 군사라도 함부로 대적하지 못한다.

하지만 군사과학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전쟁이 나면 불과 몇시간 안에 쌍방이 초토화될 게 뻔한 상황에서 조나라 군사들처럼 말 그대로의 배수진에 겁을 집어먹고 퇴각하는 군사는 어느 나라에도 없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등 뒤에 바다밖에 없다' 는 백령도 주민의 말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연일 계속되는 서해안의 긴박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햇볕정책이니 금강산 관광이니 비료지원이니 하는 대북 (對北) 의 기본 자세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가 이뤄지지 않는 데 대한 경고의 의미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남한 본토와 직접 연결되는 '다리 (橋)' 가 아쉽다고 생각하는 백령도.연평도 주민들의 결연한 의지가 안쓰럽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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