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442.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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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제9장 갯벌

이튿날 새벽 손씨는 혼자서 백두산 관광을 떠났다. 그의 의지가 너무나 끈질기고 단호했기 때문에 당일치기 관광을 떠나 보내기로 한 것이었다.

"귀가 따가워서 배겨날 재간이 있어야 말이제. " 택시 한 대를 수배하여 손씨를 떠나 보내며 봉환은 그렇게 뇌까렸다. 김승욱씨는 약속했던 오후 11시에 정확하게 맞춰 나타났다. 그녀가 점심을 사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어제와는 달리 검은 색 투피스 차림이었다. 택시를 타고 찾아간 식당은 시가지 외곽에 있는 냉면집이었는데, 조리에서부터 접대까지 모두 북한에서 온 사람들이 감당하고 있었다. 그들의 국적이 북한이라는 호기심 때문에 신선감은 있었지만, 냉면맛은 인상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찾아간 곳이 어제 일행들끼리 찾아갔던 신씽제의 시쓰창이었다. 일행들끼리 무작정 둘러보는 것과 그녀의 소상한 소개가 곁들여진 시장순례는 이해의 폭이 훨씬 넓었다.

그녀는 시쓰창에서 좌판을 벌이고 있는 상인들 대부분과 친숙한 사이였다. 그곳의 가게주인들 역시 대부분이 여성들이었다.봉환의 관심이 원산명태에 있다는 것을 알고 그 곳의 도매상들과 일일이 인사를 시켜 주었지만, 반응은 시큰둥한 편이었다.

북한에서 흘러 든 자질구레한 생활도구들은 이외에도 많았으나 워낙 조잡했기 때문에 매기는 신통치 않았다. 시장순례 두 시간, 그들은 시쓰창 곁에 있는 옌지차오 (延吉橋) 를 건너 옌지궁위안 (延吉公園) 노천 카페의 간이의자에 자리잡았다.

차일막 위로 내려쪼이는 맑은 햇살은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강렬했다. 시장을 둘러볼 동안 태호는 대체로 말이 없었다. 그녀에게 아버지의 소재를 물어본 것은 노천 카페에서였다. 우리 아버지? 그때만은 함경도 억양으로 되물었던 그녀는 아버지는 베이징으로 혼자 나가 식당을 경영하고 있다고 대답해 주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몇 년 동안 계속된 한국 특수로 연길도 소비도시가 되었어요. 중국 어디를 가봐도 작은 도시에 이렇게 많은 택시가 굴러다니는 곳도 흔하지 않을 거예요. 여성들의 옷차림도 덩달아 고급화되었어요. 몸치장에 그만치 신경 쓰게 되었다는 뜻입니다.한국처럼 여성들을 상대로 하는 상품을 개발해 갖다 팔면 손해 보지 않을 거예요. "

"가령 인조로 된 속눈썹이나 화장품, 속옷 같은 것을 노려볼 만하겠네요. " "속옷도 이젠 아무거나 사지 않아요. 디자인을 꼼꼼하게 살피고 따지는 편이지요. 화장품도 한국에서 싸구려라면, 여기서도 싸구려예요. 시장 둘러봤으면 아셨겠지만, 서울에서 볼 수 있는 상품은 여기서도 흔하잖아요. 여성 취향이면서도 흔하지 않은 상품을 찾아 보세요. 중국사람들은 한 번 사서 오래 쓸 수 있는 상품을 좋아해요. "

"우리가 그런 상품을 가져오면, 거래처는 미스 김이 소개해 주겠습니껴?" "미스 김이란 말 오랜만에 듣겠네요. 하지만 오래 듣진 못하겠네요. 약혼자가 있거든요. " "벌써 약혼까지 했뿌렀습니껴?" "약혼까지라니요? 스물 일곱인데 늦은 편이죠. "

"같은 조선족인데, 연길에서 교사로 재직하다가 지금은 베이징으로 나가 여행사에 근무하고 있어요. 자주 만나야 하는데 못 만난 지가 오개월이 넘었어요. 지난 겨울에 만나 봤으니 벌써 육개월이 가까워 오네요. "

"약혼한 사람들끼리 오래 만나지 못하면 안되는데? 여행사에 근무하다보이 서로 날짜 맞추기가 버겁겠습니더. " "자주 만나 보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흐지부지할 수도 없어요. 같은 조선족끼리 결혼한다는 것도 요즘 와선 하늘의 별따기거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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